‘만가복’브랜드로 청도 부동산분양시장을 주름잡는 조선족사나이가 있다. 구경원 (39세)사장은 청도만가복부동산유한회사를 설립한 4년여만에 ‘만가복’이란 이름을 청도지역에 널리 알렸다. 그는 지금 ‘만가복’이란 '브랜드'로 청도부동산분양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자그마한 ‘복덕방’으로 시작된 부동산 중개소
구경원씨가 고향인 흑룡강성 동녕현 삼차구진을 떠나 청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9년,  청도에서 처음으로 부동산중개소를 경영했다. 부동산에 남다른 재간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시 베이징 홍콩계부동산회사에서 근무하던 여동생의 권고에 의해 발을 디딘 것이다. 여동생은 그때 벌써 홍콩회사에 근무하면서 부동산중개로 목돈을 챙겼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구경원씨는 조선족으로서는 최초로 청도서 부동산중개소를 꾸렸다. 부동산중개소라 해야 자그마한 세집을 잡고 정식 영업허가증도 없이 휴대폰 하나 달랑 들고 신문의 한 모퉁이에 코딱지만한 광고를 때리면서 하는 중개였다.
그런데 이 사업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는 한국 상공인들과 조선족기업인들이 대거 청도로 진출할 때어서 호텔, 오피스텔 같은 고급 사무실을 임대해 쓰는 사람들이 많아 중개가 잘 됐고 수입 또한 톡톡했다.
전화가 그칠새 없었고 중개소 문앞이 불티가 났다. 하루에 평균 1건 이상 중개가 성사됐다. 중개비만도 한 건당 5000위안 이상 떨어졌다...
이것이 경험이 되고 바탕이 되어 후엔 부동산중개사업이 점차 크게 발전됐다. 2003년 그는 한국인과 합작해 청도만가복부동산유한회사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동시에 인테리어, 광고회사도 앉혔다. 무허가로 ‘게릴라전’을 하던 데로부터 정식 청도부동산중개업계에 당당히 진출한 것이다. ‘만가복’회사를 세운 첫해에 홍콩중로 번화가에 자리 잡은 양광백화점을 공동 분양하는데 성공했다. 총 7억위안 가치의 이 백화점을 반년만에 2억위안 분양했던 것이다. 따라서 청도 부동산업계에 ‘만가복’이란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사군 기질을 타고나다
90년대 초 개혁개방물결이 일면서 흑룡강성 수분하시와 동녕 삼차구진은 국경 넘어 러시아와의 무역이 급물살을 타고 있었다. 흑룡강성민족간부학교에서 공부하던 구경원씨는 학교를 중퇴하고 대 러시아무역에 달라붙었다.
그의 말대로 “순 재미로 해보는 장사”였다. 그런데 “재미로 해보는 장사”가 인이 박히고 뭉치돈이 들어왔다. 삼차구조선족진과 러시아는 국경선을 강하나 사이를 두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와의 국경 대외개방정책에 힘입어 이곳에 머리를 좀 쓰는 사람들과 간 큰 사람들은 남 먼저 러시아 장사길에 올랐다. 구경원씨가 그중 한사람이였다. 그때 그의 나이 20여 세, 학교마저 중퇴하고 장사길에 뛰어 들었으니 장사의 매력과 돈의 매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와의 허술한 무역 공간을 이용해 그는 전문 러시아의 철강, 구리, 알루미늄, 목재 등을 수입해 국내의 남방 등 지역으로 넘겨 팔아 폭리를 챙겼다. 그는 남방의 돈 있는 상인, 한국상인과 손잡고 장사를 했다. 그러니 자금유통과 판로는 문제없었다.
러시아에서 몇몇 ‘폐품수거군’들을 고용해 길거리와 폐허위에 버려진 철근과 폐철들을 주어 중국으로 실어 나르기에 ‘원가’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한 트럭을 중국경내로 실어오기만 하면 10만 위안 이상의 이윤을 챙길 수 있었다. 적은 ‘대가’로 10여 배의 이윤을 챙겼다. 평균 일당 한 트럭의 물건을 수입하여 파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이렇게 몇년이 지나갔다. 너무 쉽게 번 돈이어서 그런지 나가는 돈도 많았다. 씀씀이가 헤퍼졌고 들어오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더 많게 됐다. 후에는 러시아의 정세가 호전되고 대외정책이 안정되면서 대외거래도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수출품의 가격이 국제기준가격에 가까이 뛰어 올랐다. 그 가격으로는 국내 가격을 맞추기 어려웠다. 국제 가격으로 수입해야 하기에 이윤이 얼마 남지 않았다. 후에 다른 무역거리가 있는가 싶어 2년간 중동, 동유럽 지역을 전전긍긍했으나 별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자 무역을 접었다.
구경원씨는 다른 ‘장사’의 길을 택했다. 부동산중개업이었다. 무역을 하면서 배우고 익힌 장사기질을 부동산분양에서도 유감없이 솜씨를 펼친 것이다.
새로운 마인드로 부동산분양시장 개척
“무역에서 돈도 많이 벌어 봤고, 한때는 돈을 물쓰듯 써보기도 했다. 쉽게 번 돈이어서 그런지 또한 쉽게 돈을 날려도 보았다. 이제는 내실을 다지면서 돈을 벌 때이고 하나하면 하나 성공시키면서 할 때이다.”구경원씨가 대 러시아 무역을 하는 와중에 도출해낸 ‘경험’이었다.
장사에서 남다른 재간을 보였던 그는 부동산분양업에서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고 있었다.
현재 ‘만가복’은 청도 지역사회에서 유명한 ‘브랜드’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만가복’이란 회사이름을 걸고 부동산분양을 한지 불과 4년만에 아파트분양실적은 청도 동류업종에서 1인자의 자리에 올랐다.
“언론매체를 통한 대대적인 홍보 외에도 ‘성실, 근면, 혁신’이란 회사경영이념을 고스란히 실천에 옮겨 고객들과 부동산업체에 신용을 쌓았기에 회사가 빨리 클 수 있었다”고 말하는 구경원씨는 “만가복은 부동산건설회사의 건물 건설전의 아파트구조, 외부조형, 건축자재선택에 이르는 고객선호의 구조설계에 참여함으로써 고객들이 원하는 그런 아파트, 호텔을 건설해 분양하기에 다른 분양회사보다 실적을 빨리, 많이 쌓을 수 있게 됐다”고 다른 부동산분양회사와의 차별화를 역설했다.
이런 까닭으로 청도지역의 꽤나 이름있다는 부동산회사는 모두 ‘만가복’과 손잡고 상가, 호텔, 오피스텔, 아파트를 분양하려고 한다. 하지만 구경원씨는 큰 부동산회사라고 덥석 끌어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먹을 알이 많은 것부터 챙겼다. 굴지부동산그룹들은 자체의 브랜드만 믿고 중개회사에 주는 이윤은 아주 적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다른 부동산회사는 중개 수수료를 3%씩 주지만 큰 회사 같은 경우는 0.5~1%밖에 주려고 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아무리 큰 부동산회사의 업무라도 구경원씨는 단연 거절했다.
이것 역시 ‘만가복’의 브랜드가 널리 알려진 까닭이다. 현재 ‘만가복’은 중개수수료가 3%이상 되는 부동산개발회사와만 독점 분양계약을 체결하고 있다.
“도시화 진척이 가속화되고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대거 진입하면서 자연 주택 장만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농촌의 인구비례가 높다. 그들은 조만간에 도시로 진출하고 아파트를 장만할 것이다. 현재 청도 청양구지역의 중고주택은 농민들이 구입하는 비례가 크게 늘고 있다”고 말하는 구경원씨는 “중국의 경제가 좋아지면서 부동산경기도 따라서 호황을 누리게 되며 향후 20년 동안 청도와 같은 연해지역 도시의 주택가격은 그냥 상승선을 긋게 될 것”이라고 장래 부동산시장을 예측했다. 그만큼 부동산 분양에 신심이 있다는 풀이로도 된다.
근년 들어 만가복의 연간 부동산 분양액은 3억위안 웃돌고 있다. 현재 이 회사는 1000세대 이상 입주 가능한 프로젝트를 5개 분양 중에 있다. 도맡은 아파트단지는 모두 독점 분양이며 분양주기는 2~3년이다. 그가운데는 청도지역외에도 일조시에 위치한 신천지물류단지, 해항성(海港城) 등 4~5성급 호텔이 망라된다.
현재 직원을 70명(그중 조선족 40명, 한국인 10명) 두고 있는 이 회사는 청도, 교주, 일조 등 지역에 사무소를 5곳 설치해놓았다. 올해안으로 일조시에 사무소를 한 곳 더 설치하는 외에도 인테리어, 광고회사도 설치할 타산이다. 이제는 청도시를 벗어나 인근 도시의 부동산분양에도 개입하겠다는 전략이다.
몇년간의 노력을 거쳐 회사의 경영이 호황을 맞자 ‘만가복'은 사회에 대한 기여도 잊지 않았다. ‘만가복’은 지난해 10월 청도에서 개최된 제9회 전국조선족축구대회에 20만 위안의 거금을 선뜻 기부하는 등 동포사회의 발전에 재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전 구경원씨는 청도서원장조선족학교를 위해 '만가복장학금'을 설치했다. 재력이 확충되는 대로 장학금액을 늘릴 타산이다.
“회사를 세우고 돈을 버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구경원사장은 “회사가 커지고 경기가 좋아질수록 동포사회의 발전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박진엽 기자 김명숙 특약기자
날짜 : 2007년 03월 11일 (11시 4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