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반생, 민족 위한 의료사업에 바칠터         
 
 
"치료에 자신이 없는 병이라면 실제 상황을 환자에게 밝혀주는 것이 의사의 도덕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을 끌어봤자 환자의 병 치료 시간이 지연되고 치료비만 낭비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얼마전 새롭게 오픈한 청도한국인병원 김봉동 원장의 말이다.
흑룡강성 목단강 태생인 김 원장은 병원 개업 전부터 무료로 환자들을 치료해주면서 고상한 의덕을 쌓아왔다. 그는 환자들의 병이 완치되어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 무엇보다 마음이 뿌듯하고 성취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 원인으로 주변에는 늘 그를 믿고 찾아오는 환자들이 끊기지 않는다.  김 원장을 찾으면 믿음이 간다는 것이 환자들의 견해다. 이번 한국인병원 개업도 어찌 보면 단골환자들과 친구들이 병원을 차려보라는 부탁이 동력으로 되었다고 김 원장은 말했다.
환자들의 제의로 병원 개원
지난 2004년 김 원장은 한동안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주변 친구들과 김 원장한테서 치료를 받았던 환자들이 병문안을 나들면서 "객지에서 병 치료를 받으려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많다. 정확한 병증도 모른 채 애매한 치료비만 판다"는 불만의 목소리를 그는 많이 들어왔다. 친구들은 김봉동씨가 의덕도 좋고 의술도 높으니 병원을 직접 경영해 보는 것이 어떤 가고 제의를 했다.
"친구들의 부탁을 여러 모로 검토하던 중 결국 병원을 차리기로 결심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퇴원하자 바람으로 병원을 개업하는 일에 착수했죠." 김 원장은 병원 설립 계기를 이같이 회억했다.
이렇게 착수한 사업이 거의 2년이란 시간이 흘러서야 현실로 됐다. 워낙 병원 설립이 여러모로 절차가 까다로운데다 조선족이 직접 경영하는 병원이라고 하니 허가 받기가 더욱 힘들었던 것이다.
점찍은 일이라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성질을 가진 김 원장은 주변의 모든 인맥을 동원해 관계망을 소통시키고 충분한 가능성 보고를 작성해 제출했다.
올해 들어 그의 집착은 끝내 결실로 이어졌다. 청도시 정부에서 한국인을 위한 병원을 개설할 의향을 보이면서 김 원장의 병원설립 방안이 납득이 됐던 것이다.
"조선족병원으로 이름을 달려고 계획했습니다. 그러다 정부 위생부문에서 한국인병원을 개설할 기회가 나졌다고 제의해 결국 한국인병원으로 이름을 변경했어요. 하루빨리 우리민족병원을 개원하는 게 더욱 실질적이고 민족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앞섰습니다." 김봉동 원장의 소원은 이렇게 현실로 이어졌다.
권세 앞에서 지켜 낸 의사의 자존심
김 원장의 의사 생애는 1981년 목단강 북안병원에 취직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원래 조상들 중 의사로 있었던 분들이 있었던지라 김 원장은 남달리 의학에 집착이 갔고 각종 의난병들에 대한 연구에 흥취가 갔다.
"의학에 흥취가 있어 의학서적들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골고루 읽었습니다. 덕분에 전통적으로 전해내려 온 병 치료 방법에 구애되지 않는 습성이 생기더군요." 김 원장의 소감이다.
그는 회억을 더듬으면 인상 깊은 이야기를 했다. 한번은 위하수로 북안병원을 찾아 온 환자가 있었다. 치료는 선배 주임의사가 맡게 되었는데 한동안 치료하다가 완치할 가망이 없다고 진단을 내렸다. 옆에서 치료과정을 지켜보던 김봉동씨는 직접 치료를 맡아 볼 의향을 가지고 환자를 찾았다. 평소에 모색해낸 독창적인 치료방법을 써본 결과 환자의 병은 놀랍게 완치됐다.

당시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면서도 치료 못한 병이 30대 초반의 젊은 의사한테서 완치 됐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김 원장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현재 김봉동 원장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중풍, 목디스크, 허리디스크, 좌골신경통, 안면신경마비, 위하수 등 병들의 치료방법은 기타 서적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독창적이면서도 효과적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를 찾아오는 환자들도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목단강시 정부관원이 병을 보이러 그를 찾아와 우선 치료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김봉동씨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는 환자들도 많은데 우선권을 줄 수 없다고 요구를 거절했다. 이때 그 정부관원과 함께 왔던 기사가 왜서 그렇게 변통성이 없는 가고 김봉동 원장과 시비를 걸었다고 한다. 김 원장은 원칙은 원칙대로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의사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다.
권리를 쥔 사람들이 살판 치는 세월이라 그 일이 있은 후로 김봉동씨는 여러모로 많은 좌절을 겪었다. 1989년 김봉동씨는 의사직업을 접고 부인과 함께 한국행을 택했다.
한국에서 받은 잊지 못할 감동
1989년 말부터 김봉동씨는 한국 서울 한남동에서 자그마한 한의원을 5년간 경영했다. 5년간 김원장은 한가지 원칙을 시종 견지해 왔다. 즉 치료할 수 있는 병은 최선을 다하고 치료에 신심이 없는 병은 환자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한번은 현지에서 명망이 높은 분이 병 치료를 받으러 김 원장을 찾아 왔다. 진찰을 마치고 김 원장은 치료할 자신이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보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환자는 비용을 푼푼히 줄 수 있으니 한번만 치료를 해보는 게 어떻겠는가고 부탁했다. "치료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치료에 자신이 없습니다. 구태여 손을 써봤자 환자의 시간과 금전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김 원장은 추호의 동요도 없이 원칙을 지켰다.
그 일이 있은 후 냉대를 받았던 환자가 직접 다른 환자들을 김 원장에게 소개시켜 줬다고 한다. 솔직한 김봉동 원장의 인품과 현실을 중히 여기는 의덕에 감복했던 것이다. 김 원장은 지금도 그 일을 감명 깊게 회억하면서 "지금은 그 환자분과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원칙 하나가 서로의 마음을 이어놓은 거나 다름없죠."
김 원장의 인품과 의덕은 빨리도 전파됐다. 따라서 병원 개업 이듬해인 1990년부터 한의원의 경기는 호황을 맞이했다. 김 원장에 따르면 한국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는 동안 매일 평균 50여명의 환자를 접대했고 그들과 튼튼한 교분을 쌓았다고 한다.
"한국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던 시절을 한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한민족의 사랑을 가장 절실히 느낄 때가 그때였어요." 한국에 체류해 있는 동안 김 원장은 환자들의 병을 치료해주면서 그들의 사랑과 관심도 많이 받았다. 환자들이 보증을 서주어 무난히 병원을 경영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간단한 일상 용품마저 환자들이 감사의 뜻으로 가져다주었다고 김 원장은 말했다.
1994년 귀국하던 날 김 원장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많은 환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래주었던 것이다. 이날 김 원장은 한민족의 사랑에 짙은 감동을 받았고 언젠가는 또다시 민족을 위한 의료사업에 헌신할 꿈을 키웠다.
10여년이 지난 오늘 그의 꿈은 현실로 실현됐다. "여생에는 성심성의로 민족의 의료사업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김봉동 원장의 소박한 다짐이다.
                

/이성국, 박영만 기자


날짜 : 2007년 01월 22일 (18시 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