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계를 날아예는 작은 공룡
날짜 : 2007년 10월 14일 (23시 55분)
이길룡 프로필
▲ 1970년 5월 흑룡강성 탕원현 출생
▲ 목단강대학 중퇴
▲ 현재 청도KL무역 대표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청양지회 김철주 지회장의 추천으로 청도 KL무역 이길룡 사장을 만났다. 김철주 지회장은 이길룡 사장을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사업가"라고 평가 했다. 주밀한 시장조사와 확실한 사업추진 계획이 없이 막무가내로 사업을 추진하는 경우를 그한테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청도 즉묵에 위치한 KL무역 사무실에서 별명이 <둘리>인 이길룡(37세)사장과 대면했다. 매우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이 사장은 호방하고 스케일 큰 CEO로 통한다. 창업한지 7년째를 맞는 베테랑 CEO답게 여유롭고 노련하기 그지없다. 시장을 바라보는 식견과 비즈니스에 대한 해박한 경영노하우는 원숙한 경영자 모습 그대로다. 강한 추진력과 위기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 게 주위의 평가이다. 뛰어난 친화력 탓에 폭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그의 화법은 숨김없이 쏟아내는 직설법이다. 간간이 파안대소하며 웃어 제치는 모습에는 자신감이 넘친다. 거침없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오랜 세월 오퍼상과 다국적 기업과 합작을 한 탓인지, 뛰어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이길룡 사장은 글로벌 무역인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선제조건을 하나는 두 가지 이상의 외국어 구사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능력, 그리고 원칙과 기본에 충성하여 고객으로부터 신뢰를 받는 것, 창조적이고 진취적인 개척정신이 있는 것, 국제적 인맥을 구축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2000년 설립된 KL 무역은 주로 학생들의 문방구 등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다.
◆ 세계한상대회에서 오더를 따다
지난 2006년 10월말 한국 부산에서 열린 제5차 세계한상대회에 이길룡 사장도 참가했다. 당시 청도에서는 조선족기업협회가 주축이 되어 참가자 73명을 묶었다.
이 사장은 이번 한상대회 참가 기회를 헛되이 지나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사전에 회사의 홍보자료와 업무실적 등 상세한 서류들을 꼼꼼히 챙겼다. 그리고 어떠한 업종의 회사들과 상담을 해야겠다는 계획까지 주밀 하게 세워 놓았다. 부산에 도착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한상대회주최측은 사전에 알렸던 것처럼 상품전시회를 열었다. 세계 각국에서 몰려 온 수백 개 회사들이 전시회에 나타났다. 준비가 충족했던 이길룡 사장은 행사장 안내책자를 참고하면서 자신의 업무와 관련이 있는 회사들을 한곳 한곳 짚고 넘어갔다.
그 번 한상대회에서 이길룡 사장은 세계 각국에서 모여온 많은 기업인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행사장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었다.
청도로 온 그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저 열심히 일할뿐이었다. 그런데 몇 일이 되지 않아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6년 세계한상대회 명록>이란 책자에 수록된 청도KL무역 이름 석자가 빛을 발사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과 한국 여러 나라에서 메일, 팩스가 날아 들어왔다. 함께 사업을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된 것은 엄청난 운이 좋아서도 아니고 우연한 일도 아니다. 남들은 그에게 참 빨리 “성공”했다고 말들 하지만 이길룡 사장 자신의 생각은 다르다. 그가 “장사꾼”이 되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은 벌써 오랬다.
빈궁에 쪼들린 농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뒷골목에 아무렇게나 누워 자던 그 시절, 힘들고 피곤한 일상 속에서도 그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밤이면 쏟아지는 잠을 쫓으며 공부를 하였고 아무튼 어렵게 어렵게 대학에 가기까지 엄청난 가난을 피부로 느끼었다. 생활난으로 대학을 중퇴하고 2년 동안의 교원사업은 그에게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했다. 그후 기회가 있어 베트남에 가게 되면서 처음으로 비행장을 가보았다. 알지 못하는 글자들이 여기저기 써있고, 우리와는 다르게 생긴 사람들이 바쁜 듯 오가는 공항에서 그는 세상은 참 넓은 곳이로구나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길룡 씨의 머리를 친 것은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신비함이나 그리움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멋진 장사해 보고 싶다는 다분히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꿈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지만 그의 경우 한번도 다른 마음을 먹어 본적이 없다. 천진에서의 6년 동안의 무역수련, 유산에서의 2년 동안의 생산현장관리, 청도에서의 1년 동안의 컴퓨터학원 컴퓨터 교원, 이 모든 것은 외국을_ 다니며 장사를 하는 것을_ 위한 기초 작업이었다. 하고 싶은 일은 오직 장사뿐이었다.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그는 잘 알고 있다.
가난이란 철 천지 원수를 한주먹으로 깡그리 부셔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 교원으로부터 비즈니스맨으로의 탈피
이길룡 씨가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사업가로 나서겠다고 결심할 만큼, 깨어있는 젊은이었다.
실제 그는 대학시절 사업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혹독한 머리아픔으로 교원지원생이었던 이길룡 씨는 대학 1학년 시절, 건강 때문에 학교를 중퇴한다.
고향에 돌아와 2년 동안의 교원시절은 이길룡 씨에게 사업이 뭔지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교원시절 중 그가 벌인 일은 이른바 보따리장사.
직장생활을 할 때도 미쳐 느껴보지 못한 경제지수가 살벌한 느낌으로 체감되는 마음에는, 삼복의 불볕 무더위도 앞 일 걱정에 더운 줄 모른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장사는 해본 사람이 해야 한다고 말 들 한다. 그 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보따리 상을 하면 하는 사람마다 돈을 벌고 성공하는 것 또한 아니다. 아마추어 보따리 상으로서의 허물을 벗고 어느 정도 유지 가능한 수준이 되고 아! 나도 이제 직업에 자신을 느낀다고 할 정도가 되려고 하면 상당한 노력과 연구 그리고 실천의 시간이 걸린다.
나도 내 보따리 들고 수출 길에 오르겠다고 벼루지만 견뎌내는 정신적 자세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한다. 외지에 다녀오고 운용경비가 들더라도 막노동이라도 해서 여비를 만들어서 정해진 시간 내에 약속을 지키는 열의가 있어야 했다. 특히 무슨 일이나 그러하듯이 기대하는 효과를 산울림처럼 기대하지 않았고 목이 터져라 불러도 그 울림은 집에 가서 재생되는 이야기 나라, 동화 속의 겨울철 요술피리처럼 내가 기대한 시기보다 훨씬 뒤에 울림이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여튼 돈이 되는 모든 물건은 무조건 판매하고 그 판매전액으로 또 다른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순익을 내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원노릇을 하지 않을 바에야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업하면 돈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상아탑에 돌아 온 그는 사직서를 내고 이미 비즈니스를 꿈꾸는 예비 창업가로 변모해 있었다. 교원으로써 갈만한 회사들이 대부분 변변하지 못했던 당시 상황도 그가 사업을 꿈꾼 또 다른 요인이었다.
◆ 이길룡 씨가 오퍼상을 택한 이유
사직하고 맨 처음 달려간 곳이 천진이었다. 운이 좋게 천진에서 복장무역을 하는 부민통상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자그만 오퍼상을 첫 직장으로 골랐다. 92년 당시만해도, 지금과는 달리 대학 졸업생들은 직장을 골라서 갈만큼 “구인난”이 막심했다. 한국 기업들이 각 대학캠퍼스를 돌며 우수학생을 채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었다.
“당시 생각은 계속 교원을 하지 않으면,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과는 달리 시골 교원들의 나중에 할 수 있는 것은 교원뿐이었기 때문이죠”
이길룡 씨는 이미 창업을 염두에 두고 첫 직장을 구할 만큼 될성부른 잎이었다. 지원만하면 입사가 가능한 굴지의 대기업이나 종합상사를 제쳐두고 오퍼상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사업하기 가장 쉬운 게 오퍼업이라는 나름의 판단때문.
“돈 없이 할 수 있는 게 없나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무역업이더라 구요. 가장 빠르게 사업을 할 수 있는 분야라 판단, 배우기 위해 지원했죠.”
오퍼상임에 불구하고 직원이 무려 10여명, 작지 않은 규모의 무역회사 이다. 승승장구 했다. 그렇게 6년간 오퍼업에 매달려온 이길룡 씨.이미 창업을 위해 오퍼상을 택했던 그는 스스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2000년, 이길룡 씨는 가슴에 품은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 제 2의 게임, 이길룡 씨의 승부수
한창 컴퓨터공부 붐이 일어나기 시작한 98년도, 청도 한국기업에서나 조선족 기업에서나 컴퓨터를 잘 다루는 직원을 뽑기란 엄청 힘들 일이였다. 기회가 바로 시장이다.
반달동안의 준비를 거쳐 한국인과 합작하여 컴퓨터학원을 오픈 하였다. 1년남직한 동안 톡톡한 마진이 남았다. 적게 40만위안이었다. 사업을 확장하려고 시장조사를 하는 동안 같이 일하던 한국인이 모든 돈을 가지고 잠수해 버리었다. 미칠 정도였다. 다시 원점부터 시작해야 된다. 상상하기 힘든 어려움을 안겨줬다.
돈을 마련하여 수라장이 된 학원을 마무리해야 한다. 여기저기 친구들한테 손을 빌어 직원들에게 남은 봉급을 지불하고 학원을 끝낼 무렵인 어느날, 고객으로부터 컴퓨터가 고장이 났다고 A/S를 청구했다.
컴퓨터를 수리하면서 옆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 복장오더의 원단계산을 하는 사모님의 모습이 보기가 가냘퍼서 20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깔끔히 계산해서 드리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사장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번의 복장오더를 이길룡 씨가 받아보라는 고안이었다. 천진복장회사에서 수련한 그 대가가 <지불>된 셈이다.
이길룡 사장의 놀라운 사업수완은 이때부터 다시 한번 발휘되기 시작한다.그가 택한 결론은 혼신을 쏟아붓는 작전. 확신하나로 밀어 부쳤다. “길이 보여서가 아니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미친 듯이 밀어 부쳤던 것 같습니다.”
그는 하다가 안되면 장렬하게 산화, 한줌의 재가 된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 무역에 목숨을 걸었다. 2000년에 설립 후 3년 가까이 연간 몇 십만 위안도 채 안 되는 매출에 근근히 버텨온 상황은 2004년을 넘기면서 빠르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긴 의력과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는 이념 이 모든 것은 기염을 토한다.
이어 일본에 들어가는 문방구무역에 성공, 또다시 납품에 성공했다. 매출은 급성장했다.
◆ 이길룡 사장의 성공론, 샐리의 법칙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경우 주 5일 근무는 근로자들 얘기입니다. 오너와 개발자들은 하루 24시간 일합니다. 잘 나가는 다국적 기업 미국 본사의 경우 새벽 2, 3시 미팅은 다반사죠.”
그는 무역회사 일수록 핵심직원과 오너들의 에너지와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강조한다.
이길룡 사장이 내세우는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는 ‘목숨 건 최선’.
사업은 정말 목숨 걸고 해야 합니다. 경쟁자가 봤을 때 정말 무서울 정도로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공기회가 옵니다. 이길룡 사장은 막연히 최선을 다해서는 안되고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에너지를 쏟는 근면성은 기본이란다. 그는 성공한 사람은 그래서 업종을 바꾸더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두 번째는 ‘신뢰’란다. 사업은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 신뢰가 바탕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인적네트워크를 최대한 구축하고, 경영의 기본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사업이란 고객이 필요한 것을 목숨 걸고 수행하는 것입니다. 고객을 위해, 제품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를 위해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할 때만이 승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장이 직원 면접 시, 재미있고 특수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첫째, 개를 좋아하는가, 개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충성한다는 뜻이겠고, 두 번째는 장기를 잘 두는가, 장기를 잘 두면 명철하고 세밀한 두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싸움을 잘하는가, 싸움을 잘하면 투지력을 점검하는 좋은 대목이 되겠다.
지금 이사장은 자기가 만든 청도 KL 무역회사와 천진에서의 무역수련까지 무려 13년간 한 우물을 판 끝에 현재 모든 것을 도전할 수 있는 특특한 기반을 가진 무역네트워크를 일궈낸 전형적인 기업가였다. 그는 30대 후반,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 세계적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해 오늘도 현장을 누비는 열정의 기업가였다.
부록: 이길룡 CEO의 경영어록
먼저 소비자들한테는 가장 사랑 받는 회사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도매상이나 업소 고객들에게는 신뢰할 수 있고 가장 발전적이고 성장할 수 있는, 가장 든든한 파트너로 남고 싶습니다. 세 번째, 가장 중요한 것인데 직원들이 충성심을 가질 수 있는 회사로 만들고 싶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빨리 가고 싶은 회사, 누구도 떠나고 싶지 않은 회사로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고객이 없이는 저희가 살 수 없습니다. 고객이 저희를 먹여주고, 살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고객에게 사랑 받는 회사로 되고 십구요, 가장 사랑 받는 주류회사로 남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희 직원들이 정말 자부심을 갖고 다닐 수 있는 회사가 됐으면 하는 바 램입니다. 저는 직원에서부터 사장까지 한 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기회가 되면 직원들과 많이 어울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들을 중역들한테도 많이 강조합니다. 동호회를 활성화하고, 중역들이 동호회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있습니다.
* 둘리: 작은 공룡(恐龍).
/ 김명숙 특약기자, 홍군식 특약기자, 이성국 기자
이길룡, 그는 누구인가
무역계에서 <둘리>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멋진 경영인.
매우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
강한 추진력과 위기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 게 주위의 평.
뛰어난 친화력 탓에 폭 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무역업계의 마당 말.
취미: 외국어 공부, 책 읽기
운동: 모든 운동을 다 좋아하는 만능스포츠맨
존경하는 CEO: 잭웰치 GE 회장(독종이어서 존경한다. 기업 내 상위 30%의 직원만 교육시킨다는 경영철학은 정말 무섭다. 성공하려면 저렇게 무섭게 해야 한다)
친한 기업인: 녹성피혁유한회사의 노을규 사장
10년 후 모습: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무역 인적네트워크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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