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 한국기업 청도진출 첫 서막 열어
청도, 지난해 연말까지 韓資 실제 이용액 100억 달러 초과
날짜 : 2008년 12월 08일 (11시 25분)
1989년 12월, 45만 달러를 투자해 설립한 산동성 첫 한국독자기업-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는 이듬해 초에 개업을 했으며 다년간 뚜렷한 경영실적을 거두어 한국기업의 청도진출 첫 서막을 열어놓았다. 그때부터 청도는 한국국제자본을 활용하는 유리한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국자본은 개혁개방이래, 청도시가 외국자본을 이용하고 경제무역합작을 추진하는 핫이슈로 떠올랐으며 현재 청도시는 한국기업의 대중국투자가 가장 밀집된 지역이다. 통계에 따르면 2002년, 청도에 상주하는 한국인 인구는 거의 2만명에 달했으며 2008년에 와서는 이미 10만명에 가깝다.
청도시, 무역촉진회 설립해 투자유치 진행
1988년 3월, 청도시위, 시정부는 시대외경제무역국, 대외무역분공사, 외자판사처를 합병해 청도시 대외경제무역위원회를 설립, 전시의 대외경제무역활동을 통일관리하게 했다. 동시에 단독으로 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 청도시 분회를 설립해 시 직속 국급 단위로 정했으며 원 청도시 대외경제무역국 당위서기이며 주임인 류길덕이 회장을 맡았다. 청도시 무역촉진회는 절반 정부, 절반 민간 성질을 띤 조직이며 특수성과 융통성을 구비해 대외로 경제무역 왕래를 전개한다. 이는 향후 한국고찰에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지난 세기 80년대 말, 한국국내산업구조가 조절됨에 따라 중소기업들이 해외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청도시는 이 기회를 포착했던 것이다. 청도와 한국간의 경제왕래는 이하 3가지 조건이 부합되었다. 첫째, 청도와 한국은 거리가 가깝고 교통이 편리하다. 둘째, 한국 노동력 가격이 부단히 높아져 노동집약형 기업들은 급히 해외에서 출로를 찾아야 했고 청도는 인건비가 비교적 낮았다. 셋째, 청도는 비교적 훌륭한 공업기초를 가지고 있었다. 상기 3가지 조건으로 청도시는 한국 노동집약형 중소기업들을 신속히 흡인하자는 결책을 내렸고 한국기업을 포함한 외자기업들에게 진출조건을 창조해주었다. 따라서 외자기업, 특히 한국기업을 흡인하는 것은 청도시 무역촉진회의 주요한 사업으로 되었다.
청도시 무역촉진회 한국국내 기업현황 분석
청도시 무역촉진회 류길덕 회장은 "당시 청도와 한국은 제3국을 통한 간접 무역거래가 있었지만 정부지간은 아무런 왕래도 없었기에 한국측의 태도를 알 수 없었다. 마침 산동성위가 민간방식을 통해 한국과 경제무역활동을 진행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고 중앙으로부터도 묵인을 해줬다."고 밝혔다.
중국 및 한국과 모두 우호적인 일본의 모 상인을 통해 1988년 4월 10일, 류길덕 회장은 3명 인원들과 함께 동경으로 향했으며 다시 서울로 들어갔다. 류길덕 회장은 선후로 대한상공회의소와 코트라 등 기구를 방문, 당시 한국기업들이 구조조정을 거쳐야 했고 한국내 노동력이 부족하고 인건비가 부단히 높아진 실정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한국 공인의 일인당 월급은 중국 공인의 20배였고 많은 노동집약형 산업이 중국에 진출해 발전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류길덕 회장 일행이 한국을 방문한 후 그해 연말까지 청도시 무역촉진회는 총 35개 한국고찰단체를 접대, 한국인 300인차가 청도를 다녀갔다. 류길덕 회장은 "1988년은 청도시 무역촉진회가 한국과의 경제왕래를 중점사업으로 정한 한해였으며 여러 가지 프로젝트를 협상했다"고 밝혔다.
토프톤전기유한공사 청도 진출
초기, 청도의 투자유치는 순풍에 돛단 격이 아니었다. 청도시 무역촉진회는 1989년에 2개 프로젝트를 맡았는데 그중 하나가 토프톤전기유한공사였다. 최초,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의 위치는 사방구 모 보안전기공장이었다. 당시 토프톤은 총 면적이 2000평방미터 되는 이 공장의 단층건물을 연간 임대료 6만달러에 임대하기로 결정지었으며 공장의 모든 재직인원들을 접수하기로 했다. 공장건물을 자세히 살펴본 결과 생산라인을 설치하기에는 단층건물의 벽들을 모두 관통시켜야 했지만 보안전기공장의 영도들은 자금이 없다는 이유로 단층건물을 개조해주지 못한다고 표시했다. 토프톤이 개조비용을 절반 대주고 임대료를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양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안전기공장의 영도들은 요구에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토프톤은 모든 개조비용을 책임지고 임대료를 그대로 지불하겠다고 했다. 보안전기공장은 토프톤의 요구에 승낙을 했지만 공장개조기간 재직인원들의 2달동안 월급과 복리를 부담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토프톤전기유한공사 책임자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그들은 원래 태국에 투자할 계획을 포기하고 청도로 왔는데 이곳의 합작자들이 너무나도 성의가 없다면서 청도투자도 포기하고 귀국하겠다고 밝혔다.
제일 처음으로 청도진출을 결심한 한국기업인데 첫 프로젝트가 실패한다면 청도의 이미지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 류길덕 회장은 토프톤 책임자들을 동행해 청양구 류팅진을 고찰했다. 결과 하루만에 합작협의서를 체결했으며 한달후 토프톤은 생산가동을 시작했다.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가 생산을 가동한 후 또 새로운 문제에 부딪쳤다. 매번 기업의 관련인사들은 직항로가 없어 상하이를 거쳐야 다닐 수 있었고 토프톤의 원자재 운송과 완성품의 수출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등 해외물류도 문제로 나섰다.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류길덕 회장은 세관과 해외운항부문을 찾아 협상을 해줬으며 어려운 문제들을 풀어나가는데 물심양면으로 적극 협조해 줬다. 1991년 중한이 통항을 시작한 후 한국에서 청도로 원자재를 들여오는데 1주일이면 충분했다.
현재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총경리 임영철)는 청양구 류팅진 선가채촌, 청양구 우산촌, 교주시 마점진에 1, 2, 3 공장을 가동하고 있으며 광동성 동관에 또 하나의 공장을 증설했다. 직원은 청도 1, 2, 3공장에 1540여명, 동관에 230여명 등 총 1770여명에 이르렀고 연간 매출액은 총 1300여만 달러에 달했다. 단돈 45만 달러로 투자된 자본금이 8차례의 증자를 거쳐 현재는 340만 달러로 늘어났다.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는 스피커(A/V,노트북 컴퓨터용 등)완제품 및 부품제조를 하고 있으며 현재 토프톤에서 생산되는 제품의 거의 전부가 해외로 수출된다. 청도 1, 2, 3 공장은 전량이 12개 국가에 수출되고 있으며, 동관공장만이 중국현지에 투자된 한국의 삼성, LG에 납품된다. 토프톤에서 해외에 직접 수출되는 제품도 80% 이상이 일본계기업으로 그 품질은 인정을 받고 있다.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는 기업책임자의 미래 지향적인 판단력,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경영 장악, 지역선정과 현지지방정부와의 좋은 관계유지하고 투자업체로서 현지지방정부로부터 신뢰를 얻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토프톤 청도진출로 30여개 한국기업 잇따라 입주
청도시 대외경제무역국 기재에 따르면 청도토프톤전기유한공사 임영철 총경리는 청양구의 투자유치를 협조해 선후로 30여개 한국기업이 청도에 발을 들여놓았으며 비교적 좋은 경제적 효익을 거두었다. 이들의 성공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한국경제신문'은 '청도에 한국공업구역 건설하기', '한국기업의 투자시장-청도'를 주제로 보도를 다뤘고 '조선일보'는 '청도토프톤'을 주제로 재청도 한국기업의 투자상황을 보도, 청도는 '한국기업의 최적 투자기지'이며, '토프톤전기유한공사는 한국기업이 중국진출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보도들이 한국내에서 거대한 반향을 일으켜 눈덩이효과를 가져왔다. 그후 한국기업의 청도진출은 급속성장을 보였다.
청도시 대외경제무역국 관련인사는 1989년부터 현재까지 한국기업의 청도진출이 4개 발전단계를 거쳤다고 밝혔다. 중한양국의 건교이전은 한국기업이 청도진출 탐색단계이다. 이 단계에 한국기업은 주로 중소기업의 투자가 위주였으며 대부분이 300만 달러 이하를 투자한 복장, 신발, 모자, 가방, 식품 등 노동집약형 수출가공무역 항목이었다. 그후 투자항목은 점차 자금과 기술 집약형이 결합된 프로젝트로 변화를 가져왔으며 한국기업수가 급속도로 늘어남에 따라 한국은 청도의 최대 외자래원국가로 되었다. 1989년부터 2008년까지 한국자본은 청도에서 20년간의 발전을 거쳤으며 투자항목도 최초 45만 달러에서 현재 5.44억 달러로 커졌다. 투자분야도 최초의 간단한 제조업으로부터 고신기술현대화서비스업으로 넓어졌다.
최근년래 한국기업은 청도의 고신기술, 선진적인 제조업과 현대화 서비스업 등 분야로 발전하면서 청도진출 차원을 부단히 높이는 동시에 청도시 경제구조의 조정에도 적극적인 작용을 발휘하고 있다. 지난해 연말까지 청도시는 한국자금 이용 프로젝트를 9932개 비준했으며 한국자금 실제 이용액이 100억 달러를 초과해 청도시 실제 외자의 50%가량 점했다. /본지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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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한국인 청도서 常住
청도의 큰길과 작은 골목에는 수많은 한식점들이 들어섰고 또 한국패션, 한국공예품들이 눈부셔 수시로 용솟음치는 '한류'를 느낄 수 있다. 최근 청도시 대외경제무역국에 따르면 1989년 토프톤전기유한공사가 처음으로 청도진출을 해서 현재까지 이미 청도에 발을 붙인 한국기업은 이미 4000개를 초과했으며 청도는 중국내 한국기업이 가장 밀집된 도시로 지목됐다. 따라서 청도에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도 10만명에 가까우며 수많은 한국인들이 청도의 단골손님으로 됐다.
청도의 단골손님인 한국인들의 배후에는 기본상 하나의 기업 혹은 프로젝트가 있다고 봐야 한다. 청도시 외상투자기업협회 부회장겸 비서장인 왕동개는 “1989년 첫 한국기업 토프톤전기유한공사의 청도진출로부터 20년사이에 청도에는 이미 4000여개 한국기업이 진출했으며 2007년 5월까지 한국기업에 종사하는 전체 인원은 44만명을 초과해 청도시 모든 외자기업 종업원수의 56.7%를 점했다.”고 밝혔다.
한국기업이 청도진출을 함에 따라 청도의 상품도 한국으로 많이 수출되었다. 특히 하이얼 가전제품, 청도맥주 등은 한국에서 환영을 받고 있다.
이외 청도시 외사판사처의 통계에 따르면 2006년 청도에서 한국으로 관광을 가거나 상업무역으로 다녀온 사람은 7만-8만 인차에 달했으며 한국인이 청도로 다녀간 수치는 30만 인차를 초과했다. 청도에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현재 매년 1만명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청도는 이미 중한합작의 교두보로 발전했다. /반도도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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