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조선족사회가 형성된 지 어느덧 20년 세월이 흘러 인구 18만 시대를 맞이했다. 1992년 중한 외교관계가 건립되면서 한국제조업체를 필두로 대중 투자가 활발해지면서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형세에 남달리 민감한 조선족들의 대가 흡인했다.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80년대까지만 해도 청도조선족의 인구는 불과 1천여 명이었으나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2만 명으로 급속히 늘어났다. 이들은 혹자는 한국기업인과의 혈연관계로, 혹자는 한국기업에 몸담은 친구의 주선으로, 혹자는 창업하러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청도에 달려온 것이다. 급속한 사회변혁기에 조선족만큼 강한 민감성과 적응력을 보여준 민족은 다시 없을 것이다. 수풀처럼 일어난 이 민족의 지혜와 담량, 그리고 에누리없는 실천성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인구의 급속 성장은 동시에 많은 사회문제를 야기시켰다. 교류의 단절은 문화의 부재를 불러왔고 문화의 고갈은 범죄로 연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2~30대가 대부분인 조선족들은 넘쳐나는 정력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었고 낯 설고 물선 타향에서 말없이 쌓여지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마땅한 도경을 찾을 수 없었다. 술 먹고 주정하고 싸움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면서 조선족들에 향하는 시선들이 마냥 곱지만은 않았다. 현지인과 한국인 사이에 끼인 조선족은 어쨌던 약체그룹일수밖에 없었다.
여러모로 청도조선족사회는 리더가 필요했다.
당시 청도에는 현지 정부와의 소통이 가능한 퇴직 군관인 현귀춘씨가 있었고 과학기술 및 교육분야에 허동우 교수와 이용해 교수 등이 있었으며 기업계에는 자수 성가한 김명남씨와 남룡해씨 등 분들이 있었다. 그리고 언론지로 흑룡강신문사가 진출해있었다.
이런 엘리트의 존재는 민족사회 리더단체의 출현을 이미 예고하고 있었다.
1997년 12월, 흑룡강신문사 산동지사의 조직과 주최로 20여 명 재청도 조선족유지들이 한자리에 모여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주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회의에서는 흑룡강성 방정현 모 민족학교 교장 출신으로 당시 서라벌호텔을 경영하던 김명남씨가 회장 직책을 맡고 정부 관련부처와의 소통 및 협회 직능부문 설치, 사무실 문제 및 협회 관련 활동 등을 책임지고 추진하도록 일임했다.
이로서 청도조선족사회는 비록 민간단체이기는 하지만 그나마 자체의 리더조직을 가지고 정상적인 발전을 꾀하게 되었다. 조선족이 대거 청도로 진출하기 시작한지도 수년이 지나서였다. 여기서도 조선족다운 능동성과 패기를 엿볼 수 있었다. 세상엔 구세주가 따로 없다. 누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만을 기다렸다면 아마 지금도 조선족사회란 것을 상상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과 같은 휘황한 성과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청도조선족기업협회의 15년  역정은 날에 날마다 변신과 창의의 하루였고 발전과 번영을 위한 모지름의 시간이었다.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주비위원회는 우선 정부 차원의 인정을 받기에 노력을 경주하였다. 하여 불과 3개월 여만에 청도시기업관리협회의 인가를 취득하면서 합법적인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이어 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이론적인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우선 조선족과학가 및 고급지식인 3명을 협회의 특별 회원으로 인입하고 연후 전문적으로 조선족지식인간담회를 개최하는 것으로 정식 사업을 시작하였다. 이런 유지인사들은 청도조선족사회의 상부구조나 다름 없는 존재로서 조선족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근거를 제시하는데 큰 몫을 담당하였으며 나중에 청도시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가 출범하게 된 모태가 되었다.
한편 조선족의 정신 면모와 단합된 힘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규모 민족행사를 기획하였다. 조기협이 설립된지 불과 1년 5개월만인 1999년 4월 청도 사상 첫 소수민족운동대회인 제1회 청도시’아혁컵’소수민족운동대회가 중국해양대학 운동장에서 성황리에 막을 올렸다. 이 대회는 청도시조선족역사에 묵직한 한획을 긋는 행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으며 이후부터 청도시조선족들은 거의 고정적으로 2년에 한차례씩 이런 행사를 민족의 고유명절처럼 치르게 되었다.
조기협은 기업단체라는 자체 범위를 벗어나 거의 모든 영역을 섭렵하였다. 행정단체나 직능부문이 따로 없는 상황에서 기업협회는 거의 준정부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2000년 8월 설립된 민족학교인 이창구조선족학교가 좋은 실례이다. 이 학교의 설립을 위해 협회 관련인원들이 적극 동참한 것은 물론 현귀춘 고문은 정부 부처에 상주하다싶이 찾아다녔다. 드디어 2000년 8월에 황해가의 아름다운 도시 청도에 민족학교가 정식으로 고고성을 울렸다. 청도시조선족기업협회에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학교 설립 한달만에 회장단 성원과 대학교 교수, 학부모 등 30 여명을 조직하여 “청도시조선족소학교 교원절 경축 및 학교발전전망간담회”를 소집하기도 했다. 문화가 없으면 민족도 없다. 그때의 기업인들은 기업인이기 전에 문화인이었고 문화인이기전에 민족의 한 구성원이었다. 그들은 이 땅에서 조선족이 꿋꿋하게 살아나가자면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민족 정체성은 민족교육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하여 회원 개개인이 장학금, 조학금 명목으로 지원한 것은 물론 협회 차원에서의 후원도 줄곧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출범한 이창구조선족학교는 벽산소학교, 정양학교 등으로 교명을 2차례 변경하면서 12년간 꾸준히 이어왔고 오늘날에는 자체 교사를 짓고 600여명 학생을 갖춘 표준화 학교로 성장하였다.
민족문화를 살리는 노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고루한 일상에서 벗어나 풍부한 문화생활을 창조하고저 예술단체의 청도 초청 공연을 수차 진행하기도 했다. 2000년 2월 중한 수교 8주년 기념 “새천년 맞이 중한 친선교류의 밤” 공연이 청도시 실내체육장에서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조기협 주최로 된 이날 공연에는 한국 송대관씨와 주현미씨를 비롯해 연변가무단 유병걸 등이 무대에 올라 목마른 청도조선족의 문화기갈을 일소해버렸다. 이때로부터 청도는 한겨레 예술인들의 각축의 장으로 부상하였다. 연변가무단 공연이 수차 이루어진 것은 물론 연변 TV새해맞이 프로도 청도에서 촬영되었고 한국의 현철, 심수봉 등 유명인들도 다녀갔으며 KBS의 전국노래자랑까지 청도에서 진행할 정도로 청도는 그 지명도를 널리 알렸다. 여기에는 청도조선족기업협회가 수년간 알심들여 민족문화토양을 다듬은 노력과 갈라놓고 운운할 수 없다.
기업협회는 역시 기업이 위주이다. 하여 조선족기업들의 어려움 해소에 전력을 다했고 해마다 회원들을 조직하여 세계한상대회 등 행사에 참가하였다. 하여 중국에서 가장 많은 회원이 참가하는 단체로 알려졌으며 조기협 회장은 한상대회운영위원을 겸임하는 영예도 가지게 되었다. 이외 2004년 3월에 온주상회와 더불어 공동으로 경영세미나를 진행하는 등 기업인 양성 프로그램을 해마다 경영해왔다.
청도시조선족기업협회는 민족사회의 코기러기로서 민족간의 단결과 친선, 화합에 주력했다. 그간 청도조선족사회는 기업협회 외에 노인협회, 여성협회, 골프협회, 문화인협회, 축구협회, 작가협회 등 기능별, 취미별 단체들이 난립하는 형국을 맞게 되었다. 동호인 모임에 가까운 이런 단체들은 객지에서의 외로움을 달래고 문화생활을 풍부히 하는데 한몫 했지만 자칫 민족사회를 갈갈이 흩어놓는 역작용도 불러올 수 있었다. 이때도 역시 조선족기업협회가 앞에 나섰다. 2002년 4월에 첫 조선족단체 유지인사 간담회를 개최한데 이어 거의 해마다 만남의 장을 마련해왔고 2009년 2월 조기협의 주선으로 사상 처음으로 조선족단체장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선족합일체 단체 설립의 필요성에 공감한 이번 단체장연석회의는 비롯 만족할만한 결과를 도출하지는 못했어도 민족행사를 서로 힘을 합체 진행하자는데 의견일치를 가져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뿐이 아니라 조기협은 사회공헌과 자선활동, 공익사업에도 앞장섰다. 일찍 2000년 6월, 청도시조선족기업협회는 회원들을 조직하여 황금해안에서 “2000년 환경천년- 행동에 나서자”라는 주제로 된 재청도조선족들의 환경보호활동을 펼쳤다. 150여 명이 참가한 이날 행사에서는 “환경보호선언”이 낭독되고 참가자들이 해변가를 누비며 쓰레기를 주었다. 이때로부터 청도시의 거의 모든 자선활동과 공익활동에서 조선족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있었다. 바다를 오염시키는 녹조제거 현장, 식수 현장, 쓰레기줍기 현장은 물론 2008년 6월 사천지진모금행사에서는 42만 여원이나 되는 거금이 모아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장애인 구조, 백혈병, 심장병 등 난치병 후원 및 고아원, 양로원 등에는 해마다 조기협의 사랑의 손길이 닿고 있다.
청도시조선족기업협회는 1997년 제1대 김명남 회장으로부터 제2대 남룡해, 제3, 4대 황민국, 제5대 정경택,  제6대 한용태, 제7,8대 김창호 회장에 이르기까지 15년간 시종여일 구심점 역할을 놀면서 민족사회를 리드해왔으며 부의 창출과 더불어 문화, 예술, 교육 등 제반 분야에서도 부인할 수 없는 역할을 감당해 진정 민족사회의 코기러기로 이미지를 굳여왔다.
청도조선족기업협회의 역할과 공헌은 역사에 길이 남아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