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기업가 남룡해 세계한민족경제인 중심에 우뚝 서다 
월드옥타 30년 최초 조선족 부회장 탄생

 

 

 

지난 10월 26일 한국에서 열린 월드옥타 정기총회 신임회장단선거에서 청도코리아수정실업유한공사의 남룡해 대표가 상임집행위원(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월드옥타30년역사에서 조선족이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급속한 발전을 가져온 중한경제교류와 한국기업의 중국진출에 기여한 조선족경제인들의 업적에 대한 인정을 의미한다.
기자는 대회기간 촬영예술가 출신으로 사업에 성공한 남 부회장을 인터뷰하였다.

 

청도에서의 새로운 창업


중국 강서대학 신문학부 사진촬영 전업을 졸업하고 선후 연변촬영가협회 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한 남룡해씨(56세)는 1994년 창업의 꿈을 안고 해변도시 청도에 진출, 여러 업종의 사업을 시도하면서 수많은 우여곡절과 시행착오를 경험하면서 최종 2002년에 "코리아수정실업유한회사"를 성공적으로 설립하였다.  또한 그 당시 한창 개발중인 청도시의 부동산개발의 틈새를 노리고 대담하게 투자하여 수많은 부동산자산을 창출하였으며 부동산자원의 우세를 빌어 매입, 매각, 임대의 형식으로 운영하면서 관광서비스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청도코리아수정실업유한공사는 현재 청도시중심과 황도개발구에 5,600㎡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으며 청도에서 가장 대표적인 비지니스종합빌딩인 세계무역빌딩에 자사소유의 한식당과 사우나, 그리고 그린골프장을 직접 경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향후 자사소유의 건물에 현대식 비지니스호텔을 설립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현지사회 활동 및 봉사에 적극 참여


남 부회장은 사업여가를 타서 현지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조선족사회의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현재 청도시 시남구 정치협상위원회 위원, 청도시 시남구 소수민족연합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그는 청도시정부와 민족기업 및 민족단체간의 원활한 관계 유지를 위해 한몫하고 있으며 청도총영사관, 코트라청도무역관 등 한국공관과 한인단체 및 유명인사들과의 친목을 다지면서 한민족사회의 안정되고 화목한 발전을 도모하는데 많은 공헌을 하고 있다.
그는 많은 문화예술행사도 조직하였다. 2006년에 "중국조선족축구대회"를 주도한데 이어 이듬해에는 "중국조선족학술세미나"를 주최했으며 2008년에 "중한하나로가요제"를 공동 개최했고 지난해는 연변가무단의 대형가무극 "장백산아리랑" 공연을 협찬하였다. 이런 행사들은 민족의 기상을 떨치고 민족의 자부심을 키워주었으며 민족의 우월성을 널리 홍보하였다. 특히 재청도한국인들과 공동으로 "중한하나로가요제"를 개최함으로써 조선족과 한국인들의 화합과 협력의 장을 마련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는 또 청도조선족학교에 장비와 시설을 지원하여 민족교육의 발전에도 일조하였다.
이밖에 청도조선족사회를 리더할 주력은 과학문화인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07년에 각 대학교의 교수, 박사들을 주축으로 공무원, 연구원, 학자, 문학가, 예술가 200여 명을 조직하여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 해마다 두 번씩 민족사회문제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조직해왔다.
 한편 지방정부와 한국총영사관에 적극 협력하여 한민족사회의 안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왔으며 중일한경제발전협회 부회장 신분으로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을 도우면서 한중친선과 한중경제교류에 크게 기여하였다.

 


월드옥타 청도지회 설립


남 부회장은 1994년에 중국최초의 월드옥타 청도지회를 설립하고 10여 년 간 회장을 역임하면서 회원들을 거느리고 세계 각지에서 개최되는 월드옥타의 행사에 빠짐없이 참가하였으며 청도지회를 전중국 제일의 규모로 성장시켰다.
동시에 청도지회를 인솔하여 월드옥타에서 주최하는 차세대무역스쿨을 해마다 개최하여 수백명의 차세대를 양성하였다.
남 부회장은 중국내 각 지회와 주동적으로 협력관계를 건립하고 상호 친목과 연대를 강화하였으며 월드옥타 중국지역 활성화에 큰 역할을 담당하여 "형님지회"의 "형님회장"으로 통하고 있다. 따라서 축적된 경험을 전수하여 연대지회, 심천지회 등 신 지회의 창설과 운영에 귀중한 조언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월드옥타 전중국네트워크의 구축에 소중한 기초를 닦았다.
향후의 계획에 대하여 남 부회장은 "전중국 조선족정치인, 과학문화인, 기업가, 예술인 및 유명 민족인사들과의 폭넓은 교제를 활발히 진행하여 재중국동포사회를 이끌어 나갈 우수한 리더들을 묶어세워 중국 각 지역의 조선족사회가 단합하는 뉴대를 형성하고 민족의 문화와 전통을 계승, 발전하는데 최선을 다 할 것이다."고 밝혔다.                   
 

/박영철 기자 piao320@hanmail.net


 날짜 : 2010년 11월 12일 

 

    
 
 
남룡해 "우리 문화는 우리 경제가 살려야 합니다"
산둥성 칭다오시 칭다오코리아수정실업유한회사 회장 남룡해 인터뷰


[흑룡강신문] | 발행시간: 2009.10.15일 10:53

 

(흑룡강신문=하얼빈) 개혁개방이후 연해 대도시에 진출한 각 계층 조선족들가운데는 문화교육계의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새로운 조선족의 삶의 터전에서 자신의 높은 문화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창업에 성공했으며 또 한편 현지 조선족사회의 문화를 창설하고 이끄는 코기러기로 되면서 조선족사회의 건강발전을 이끌고있다.
청도시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회장인 남룡해(56세)씨가 바로 그중의 전형적인 사람의 하나다. 청도시20만명 조선족사회의 민족경제와 지역문화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다.

연변에 있을 때 연변조선족자치주촬영가협회 주석, 중국예술촬영가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담임하였고 《전국덕예쌍형 10대 우수촬영가》에 선정되고 또 한국 《영상의 해》 문화공로패 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상을 수여받은 그는 철두철미 문화인이였다.
그러나 1994년도 청도에 진출해 상업에 뛰여들면서 청도시의 유명한 청도코리아수정실업유한회사를 일떠세웠다. 선후로 청도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중한경제발전협회 부회장, 사단법인 중일한경제발전협회 부회장, 옥타 청도지회 지회장 그리고 2007년에는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담임하고있는 그는 성공한 기업인이면서 또 문화인이다.

 

예술의 꿈 이루려고 타향에서 상업에 진출


남룡해회장이 상업진출을 결심하고 청도에 진출했던것은 1994년도의 일이다. 당시 연변조선족자치주 문련에서 촬영작가로 이미 두각을 나타냈고 또 연변주촬영가협회 주석으로 활약하던 남룡해씨에게 있어서 상업무대 진출은 나름대로의 의미와 뜻이 담겨져있다.
그당시 남룡해씨는 사진예술가가 꿈이였으나 높은 경지의 예술을 지향하는 과정은 부득불 경제가 밑받침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것이 문인 남룡해씨를 상업에 종사하게 부추겼다. 상업에서 실패해보아야 원상복귀로 정든 카메라를 다시 들고 사진을 찍으면 된다는 배짱 하나만을 가지고 남룡해씨는 1994년도에 정든 고향땅 연변을 떠나 산설고 물선 산동성 청도시로 진출했다.
사업성공의 비결 : 남들이 보아내지 못하는것들을 보아내고 그것을 경제적가치가 있게 변화시키는 독특한 안광

남룡해회장이 청도에 진출한지도 올해까지 이미 만 15년철이다. 그동안 남룡해회장은 9000여평방메터 규모의 상업건물에 대한 소유권과 사용권을 가지게 됐으며 청도시정협위원에 외교부소속 중일한 경제발전협회 부회장 등 성공적인 기업인으로 성공했다.
산설고 물선 낯선 타향에서 경제적인 성공을 거둘수 있게 된데는 남보다 먼저 상업기회를 보아내고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그만의 독특한 상업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도시에 있는 향항중로가 지금은 전 청도시에서도 가장 번화한 황금위치가 되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별반 투자자들의 중시를 받지 못하는 거리였다. 1994년 청도진출당시 남룡해회장은 향항중로가 조만간 번화한 상업거리로 탈바꿈할것임을 판단하고 이 곳에 점포 하나를 임대했다. 집을 임대할 때에도 향후 늘어나게 될 건물수요에 대비해 면적을 더 늘릴수있는 단층건물을 임대하였다.
아니나 다를가 95년도 이후부터 향향중로는 상업거리로 서서히 탈바꿈하면서 투자자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 상업용 건물들이 딸리기 시작했다. 이 기회를 언녕 예견한 남룡해씨는 단층건물우에 추가로 2층과 3층 건물을 더 지어 건물사용면적을 임대면적의 배로 늘렸다. 남들보다 앞선 생각과 안광이 상업기회를 만들어주고 또 부를 창조하게 한것이다.
남룡해씨가 향항중로에 임대한 건물은 후에 전 청도시에서도 유명한 코리안타운의 노란자위가 되였다. 이어 낡은 주택을 임대하고 개조하는 등 여러 가지 경로로 규모를 부단히 확장하여 나중에는 《촌토촌금》인 청도 향항중로에 수천평방메터의 경영장소를 확보하였다.
제1차 창업 성공에 이어 남룡해회장이 제2차 창업을 시작으로 청도시 세계무역중심 지하에 건물을 임대하고 진출했던것은 1998년도의 일이다.
당시 건물지하를 임대맡은 남룡해회장을 두고 당지 사람들은 장사가 지하에 들어가니 망할수밖에 없다면서 《호박쓰고 돼지우리에 들어간다》고 비웃었다. 당지사람들의 인식에 장사는 지하에 들어가면 망한다고 믿었던터인데 거기에 또 800만원이나 되는 돈을 지하에 투자한다니 리해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옆사람들 이야 뭐라든 남룡해회장은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세계무역중심 지하건물을 임대하여 청도에서 가장 호화로운 대형사우나인 수정궁사우나를 오픈했다.
수정궁사우나가 후날 전 청도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지게 되고 청도의 사우나문화를 선도했다고도 말할수 있는데 이는 남룡해회장이 중국식과 한국식 사우나문화를 접목시킨 결과라고도 말할수 있다.
이를테면 한국식사우나는 목욕탕물이 깨끗하고 랭온탕 온도가 시종일관 고른데 반해 차 한잔 나누면서 쉴수 있는 곳이 없는것이 흠이다. 그러나 중국식목욕탕은 목욕탕물이 정수가 잘 안됐고 물온도가 들쭉날쭉한 반면 차 한잔이라도 마실수 있는 쉼터가 있는 우점이 있다.
남룡해회장은 상술한 중국식 및 한국식 사우나방들의 부족점은 미봉하고 우점은 리용하는 방식으로 사우나환경도 좋고 휴식공간도 있는 목욕과 휴식, 오락이 어우러진 새로운 사우나문화를 만들어냈다.
지금은 이같은 사우나들을 곳곳에서 만날수 있지만 12년전인 당시에만 하더라도 이같은 사우나 문화들은 주변에서 볼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켰으며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다른 사람들이 장사가 안된다고 하던 지하상가에 사우나를 오픈했지만 장사가 잘되여 나중에는 지하상가 건물을 매입하게까지 되였다.
남룡해회장은 남들이 보아내지못하는것들을 보아내고 그것을 경제적가치가 있게 변화시키는 독특한 안광이 있다.
향항중로의 쓸모없는 자투리땅이라고 모두에게 외면받던 변전소자리를 옮겨 그 곳에 4400평방메터이나 되는 상가건물을 앉히자 비로소 당지 사람들은 그 자리에 이렇듯 훌륭한 상가건물을 지을수 있었구나 하고 뒤늦게 경탄했다.
또 세계무역센터의 사용률이 아주 낮은 회의실을 개조하여 원래의 2200평방메터되는 면적을 3200평방메터로 늘리고 또 회의실을 대형건신방, 나이트클럽, 음식점, 회사사무실 등으로 활용할수도 있게 하자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사회의 힘 모아 현지 민족 교육문화의 터전 마련

남룡해회장은 돈벌면 골프치고 좋은 자가용 타고다니고 잘 먹고 잘 입는것보다는 자라나는 우리 민족 후대들에 대한 교육문화전수가 더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청도시에 살고있는 조선족들은 거개가 개인사업을 위주로 하는 군체이기 때문에 개성이 강하고 어떤 조직적인 제한과 지배를 받기 싫어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룡해회장은 자세를 낮추고 그들과 가까이 하면서 함께 여러 가지 모임들을 만들면서 우리 민족 문화를 말하고 예술을 말하면서 문화적인 이벤트를 많이 조직했다. 처음에는 이러한 행사들을 기업인들 위주로 펼치다가 점차 문화인들도 가담시켜 날따라 행사의 질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그동안 경로대잔치, 제1차 청도조선족운동대회 등 여러 가지 활동들을 조직하여 청도조선족들을 단합하고 힘을 모으는데 일조했다. 2004년도에 청도시에서 중국조선족축구대회 소집, 성사를 주도, 현재 청도지역에서 우리 말로 된 연변위성TV프로그람 시청 사업을 추진, 이미 청도시 성양구 일부지역에서는 연변위성 TV시청이 가능해졌으며 조만간 청도전역에서의 시청도 가능해질것으로 보인다.
조선족을 대상한 중학교는 원래 청도시에는 없었거니와 만들자고 해도 엄청난 자금이 들지만 청도국기외국어국제학교에 조선족반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조선족어린이들이 유치원에서부터 고중에 이르기까지 우리 말 교육을 받을수 있도록 적극 협조했다. 조선족집거구가 아닌 타지역에 조선족학교를 세운 경험은 당면 존재하고있는 조선족 산재지역교육의 출로와 경험이지 않을수 없다.
향후 남룡해회장은 현유의 청도시 2개 조선족소학교를 국유화하는 문제와 조선족문화센터를 세우는 일을 적극 협조, 추진할 예정이다. 《이같은 일들은 민족 문화 및 교육에 관한 중대한 일들로써 내가 하지 않아도 어차피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하루라도 일찌기 서둘면 그만큼 리득도 크다》는게 남룡해회장의 주장이다.

 

우리 문화는 우리 경제가 살려야 한다

남룡해회장의 민족사업에 대한 견해는 바로 《우리 문화는 우리 경제가 살려야 한다》는것이다. 그는 민족사업은 희생이 필요한것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민족사업의 무풍지대라고도 할수 있는 청도시조선족사회에서 하면 할수록 깊어지고 하면 할수록 어렵고 하면 할수록 힘이 드는 민족사업은 쉽게 거창한 성과를 바라기는 어려울것이다. 그러나 남룡해회장은 《나의 작은 노력이나마 민족사업에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남기고싶다》고 말한다.
《내가 번 돈은 다 내 돈인것은 아니다. 내가 번 돈을 사랑하는 민족사업에 쓰는것은 참말이지 아주 유익한 일이지 않을수 없다》이는 남룡해회장의 말이다. 그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그 자신이 이렇게 했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다.
기자의 취재중에도 남룡해회장은 연변무용가협회의 새해 《당대조선족무용》전시공연 연구토론활동에 대한 후원기획을 의뢰받고있었다. 동북3성 범위내에서 무형문화재로 선정된 작품들로 행사를 조직하게 된다고 남룡해회장은 알려주었다.
그동안 남룡해회장은 청도 조선족 제1회 운동대회, 새천년맞이 중한친선의 밤, 청도 조선족로인 경로대잔치, 제9회 전국조선족축구운동회, 《청도 조선족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 학술세미나, 청도 조선족차세대 무역 스쿨 , 전국 제13회 《중국 조선족 발전을 위한 학술심포지엄》, 《중한 하나로》 가요제, 연변가무단 《장백 아리랑》청도 초청공연 등등 허다한 민족행사들을 주최하면서 청도지역 조선족사회 경제문화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남룡해 프로필: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연변촬영가협회의 직원, 부비서장,부주석,주석. 길림성촬영가협회 부주석, 중국예술촬영가협회 부주석 등 직무를 력임
연변조선족자치주《진달래문화상》 수상
전국덕예쌍형 10대 우수촬영가, 중국촬영가협회 국제문화교류기여상
한국 《영상의 해 》문화공로패 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상 수상
1993년에 청도에 진출
청도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장 및 중한경제발전협회 부회장
2007년에 청도조선족과학문화인협회 창립
청도시조선족운동대회 및 제9차 전국조선족축구대회 조직
연변가무단의 《장백의 아리랑》 청도에 유치
현재 청도시정협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