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병원 재도약 발판 마련하여 2차 창업 개시        
 
날짜 : 2011년 09월 13일 (11시 10분)    
 
 
 

칭다오 한국인병원 재도약 발판 마련하여 2차 창업을 개시
전문가 포진 선진 설비 도입
전탁건강서비스가 핵심 포인트

중국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병원”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칭다오한국인병원(원장 김봉동)이 일전 추가로 1500제곱미터에 달하는 건물을 확보하면서 2차 창업을 모색하고 있다. 이로써 한국인병원은 3층 건물에 총 건축면적이 4000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중등 규모 이상의 병원으로 업그레이드되었으며 내과, 외과, 부인과, 한방중의과, 침구, 화험, 초음파실, 물리요법실, 재활센터 등을 구전히 갖추고 병상만 60여 개를 확보하면서 한층 경쟁력을 가지게 되었다.
칭다오에 한국인병원이 세워진 것은 우연한 사연때문이었다.
2003년 8월의 어느날, 김봉동 원장은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하신 불구의 위험에 처했다. 수년간 칭다오시 번화가에서 조선족 최대의 음식점을 경영하고 중한합자기업도 운영해온 김봉동 원장은 그간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수석 부회장직도 연임해오면서 투자유치, 민족화합, 불우이웃돕기, 사회봉사 등 당지와 칭다오한겨레사회에 큰 공헌을 해왔었다. 적지 않은 민족단체들은 초창기에 거의 김봉동 원장의 지지와 협력하에 어렵사리 발걸음을 떼엇었다. 그랬기에 그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이 퍼지기 바쁘게 많은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다. 그중 오래동안 거래해왔던 한국분이 한분 있었는데 인사치례끝에 무심코 비친 말이 김원장의 마음을 자석처럼 끌었다. 그 한국분과 아주 가까운 친구가 일전 길 가다가 자칫 넘어졌는데 그저 간단한 인대손상임에도 X레와 CT검사에 임상실험에 두루 검사 비용만 천여 위안이나 썼다면서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생활하면서 언어가 통하지 않아 겪는 불편과 울분을 하소연한 것이다.
일찍 목단강의학원을  졸업하고 베이징”301”병원에서 연수를 마치고 30여 년간 병원에 몸 담았을 때는 물론, 선미미식당을 운영하면서도 간간히 주변의 아픈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면서 의사본분을 지켜왔던 김봉동씨는 누구보다도 환자가 된 서러움과 억울함을 잘 알고 있었다. 한국인들만의 불평이 아니였다. 한족들은 그나마 이런 저런 “꽌씨”가 있어서 그래도 덜 당하지만 그것마저 없는 조선족은 말문이 막혀 불필요한 돈을 써가면서도 따질 수 없었다.
(아, 어쩌면 이게 내가 해야 할 진정한 일이 아닐까?!)
그때 뇌리를 친 생각이 바로 칭다오에 우리민족 병원을 세우자는 것이엇다. 이제 더 이상 언어 불통때문에, 꽌씨때문에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민족사회에 기부하고 한겨레 행사에 후원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기술로써 민족의 애로를 덜어주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일을 추진하자고 보니 시작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우선 병원 허가부터 난제였다. 아직 시장화가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중국에서 클리닉이 아닌 완전 병원의 개원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이곳 저곳 청탁하고 손이야 발이야 사정하면서 어렵사리 허락을 받게 되었지만 병원 명칭에서 또 걸렸다. 원체 남달리 민족심이 강한 김봉동씨는 안하면 안했지 일단 할바엔 꼭 “한국인병원”이란 타이틀을 사용하리라 처음부터 마음 먹었었다. 여러 가지 민감한 사안까지 펼쳐내면서 한사코 거절하는 주관 부처를 수없이 찾아다니면서 천생 겪어보지 못한 수모도 당했지만 끝내 자신의 소원대로 중국에서 유일한 “한국인병원”의 허가가 완료되었을 때는 온세상을 다 가진듯 뿌듯했다. 하지만 그때는 살같은 세월이 속절없이 흘러 2006년도 다가는 12월 29일이었다.
호사다마란 말이 있다. 언어 장애를 없애고 바가지 진료비로 인한 억울함을 덜어주고저 시작한 일이 생각처럼 되어주지 않았다. 김원장의 독특한 침구 요법에 의해 완쾌된 환자들의 입을 통해 가끔 찾아오는 환자들외에 대부분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왔다. 장기간 큰 병원에 의존해온 관성심리때문에 엄중할 수록 억울함을 감안하면서도 큰 병원으로 달려갔고 그곳에서 희망을 완전히 잃었을 때에야 비로서 한국인병원으로 찾아왔다. 그래도 김원장은 웃으면서 받아주었고 다년간 쌓은 노하우로 한분 또 한분의 환자를 사선에서 구해냈다. 한국인병원은 그렇게 저렴한 비용과 친절한 서비스, 그리고 윤활한 언어소통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갔고 김봉동 원장은 뇌졸중과 안면마비, 좌골신경통, 각종 경추디스크, 완고성두통, 심혈관병 등을 침구로 치료하는 명의로 점차 소문나기 시작했다.
점차 제 궤도에 들어설 즈음에 금융위기라는 무서운 시련이 갑작스레 닥쳐왔다. 지구촌 곳곳에서 아우성소리가 난무하는 마당에 한국인병원만이 무풍지대가 될 수는 없었다. 거기에 가정적인 불운도 함께 겪으면서 김원장은 도산 직전까지 몰렸다. 그래도 어렵사리 만들어진 우리민족 병원만은 살려야겠다는 일념으로 김원장은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이겨나갔다.
“그때 조수동 부원장님이 저에게 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조교수님만 아니었다면 아마 오늘까지 견지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
경제적인 여건때문에 더이상 고급의무일군을 초빙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조수동 교수는 묵묵히 치료와 관리 업무를 분담해주었다. 중국연변조선민족의학연구회의 창시자의 한분인 조수동 교수는 “세계조의사상의학(체질학)” 연구회를 5차례나 주최할만큼 명성 높은 전문가로 현재도 중국연변전통의학체질연구소 소장 직무를 겸하고 있엇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다. 그만큼 기적이란 것은 항상 준비된 사람한테
만 찾아오는 법이다. 현지 민족사회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 후원하에 한국인병원은 기사회생의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병원의 이미지가 널리 알려지고 치료 효과가 입을 건너 전해지면서 환자들이 다시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한겨레 단체들이 찾아와 아이디어를 내는 등 고민을 함께 하면서 적극적으로 도와나섰다. 덕분에 한국인병원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으며 나아가 1500제곱미터에 달하는 옆 건물까지 임대하여 재활센터로 활용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선진적인 의료설비도 새로 구입하고 내과, 외과, 화염실, 초음파, X광 등 부서에 전문의를 초빙 배치했다.
“이제 저희 병원은 단순히 언어소통의 우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지의 큰 병원들과도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선진 설비와 전문가들을 갖추었습니다. “
시장에 따라 어차피 변할 수 밖에 없다는 김봉동 원장은 그래도 하드보다는 소프트에 더 치중하는 자세를 보여주었다. 뜨거운 민족애, 자상한 서비스, 그리고 저렴한 가격과 친절한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치료보다는 예방의 지혜가 평생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김원장은 지금 새로운 아이템을 개발하고 실천하고 있었다.
그것인즉 여직 어느 병원에서도 실천해보지 못한 “전탁건강서비스(保康中心)”이다. 병실을 콘도식으로 꾸며서 아파트 임대가격과 비슷한 입주비를 받고 전문의의 지도아래 하루 삼시를 입주인의 고질병과 신체 상황에 맞추어 영양식을 제공하며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할뿐만 아니라 치매나 기타 고질병이 도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각자의 신체자질에 맞는 운동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다. 경로원이나 양로원과는 차별화된 이 요양서비스는 몸에 고질병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나 심장병 등 돌발성 질환을 가지고 있는 독신들에게 생활적인 보살핌은 물론 정기적으로 물리치료를 하거나 혈압을 체크하는 등 관리를 해줌으로써 환자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 주 특점이다. 이미 여러 명의 환자가 입주했으며 입주 문의도 끊기지 않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