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세를 틀어잡고 외연 확대에 주력
“한국인병원” 현상의 실태조사
날짜 : 2011년 09월 13일 (11시 14분)
1천 여만위안의 투자금으로 세워진 한국인병원이 설립 5년이 되어오면서 소리소문 없이 조용히 보내다가 요즘 좀 분주살스러워졌다. 새로운 선진적인 의료설비를 구입한다더니 얼마 안되어 또 1000여 제곱미터에 달하는 옆 건물까지 임대하여 재활센터로 활용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어 한국의료기구의 초청을 받고 서울로 침구 강의 및 왕진을 가야 할 김봉동 원장이 갑자기 한국에서 들이닥치는 “단체환자”때문에 발이 묶였단다. 어쩔 수 없이 서울행을 뒤로 미룰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모 기구 주청도대표처의 책임자였던 분이 귀국후 고질병으로 앓고 있던 친구에게 한국인병원을 적극 추천했던 모양입니다. 한가족 4명이 팀을 만들어 찾아왔어요. 그중 당뇨병으로 앓으면서 한국에서는 치유 불가능으로 판정되어 거의 폐인이 되어가던 분이 계셨는데 저의 침을 맞고 보름만에 기적같이 효험을 보고 한국에 가서 새로운 팀을 만들어오게 된 거지요.”
침을 놓으면서 간간히 환자들과 가벼운 농담도 주고 받는 김봉동 원장, 조용하면서도 발빠르게 오가는 의료일군들, 고급스러운 병원시설들, 넓고 시원한 병실들, 모든 것이 그렇게 새롭고 궁금했다. 짧은 시간사이에 많은 것이 변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변해있었다.
한국인병원은 어떤 계기로 탈피를 모색하게 되었을까? 구경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변하지 않으면 안되게 하였을까?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으며 그 변화의 목적과 의의는 무엇일까?
김봉동 원장은 한마디로 시대의 요구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한국인병원을 꾸리게 된것은 언어의 불통으로 인해 당하는 환자들의 불이익을 감소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만큼 최초의 동기는 많이 단순했다. 한국인병원을 찾아오면 더 빨리 낫는다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한국인병원에 오면 말이 통해 편하고 가격도 싸다를 먼저 알렸던 거 같다. 병원은 우선 아픈 사람을 고치는 곳이다. 환자 역시 아픈 몸이 하루 빨리 치유되기를 바라는 만큼 불편은 물론 금전적인 지출도 결코 우선시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인병원은 이 점을 의식하지 못했다. 하여 당장 몰려올 것으로 예상했던 우리민족 환자들이 예나 다름없이 목돈을 팔면서,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큰 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래서 김봉동 원장은 30여 년간 연마해온 아까운 침술을 마음껏 발휘해보지 못했다. 말 그대로 뜻과 재간을 한껏 펴볼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던 것이다.
김원장은 별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여러번 받았다. 그의 침술을 잘 알고 있는 한국의 여러 의료기구들에서 그에게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왔던 것이다. 그래도 김봉동 원장은 용케도 그 시련을 이겨냈다. 시작했던 곳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오기가 그를 지탱해준 힘이었다.
조수동 부원장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다. 중국연변전통의학체질연구소 소장직을 겸임하고 있는 조교수는 4대를 이어온 중의로서 세계조의사상의학연구회를 5차례나 주최할만큼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전문가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인병원의 진로를 모색하는 계기와 과정이 되었다.
그들은 우선 민족사회의 시선을 끌어오는데 전력했다. 병치료에도 민족적인 생활습관에 의한 치료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을 집중적으로 강조했다. 위병이 있을 경우, 한족들은 일반적으로 쌀밥을 먹지 말고 죽을 먹으라고 이른다. 그런데 조선족은 태어나서부터 쌀밥에 익숙해진 몸이다. 며칠동안 죽만 먹을라니 말 그대로 죽을 맛이다. 그래서 우리 민족 의사들은 쌀밥을 먹지 말란 말을 웬간해서는 아니한다. 대신 밀가루 음식을 절제하라고 타이른다. 중의에서 김치 또는 매운 음식을 절제시키는 것도 우리민족에게는 고역이다. 민족에 따라 다른 식이요법은 그대로 동포들의 귀에 쏙쏙 들어왔다. 한국인병원으로서의 존재가치가 알려지게 된 계기였다.
관심을 기울여주는 사람이 점차 늘어남에 따라 유기적인 치료법도 도입했다. 김원장의 침술과 조교수의 중의를 결부시켜 치료효과를 한층 배가시켰다. 한편 치과, 부인과 등에 명성 높은 전문의를 초빙함으로써 종합적인 병원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다. 현재 부인과는 전보다 엄청 활성화되어 환자가 줄을 잇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병원 시설을 확충하는데 모박았다. 직장경(肛肠镜), 광파치료기(光波治疗仪), 견인치료기(牵引治疗仪) 등 새로운 설비를 보충함으로써 의료설비가 대형화, 선진화, 구체화, 전문화로 고착되었다.
이 토대위에서 병원의 인프라를 완벽화하는데 주력했다. 원유의 건축면적 2500제곱미터에 추가로 옆건물 1500제곱미터를 확보하여 재활센터로 활용하였다. 병원이라고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벽에는 한국식 벽지를 붙였고 바닥은 난방을 깔고 마루를 폈다. 병실마다 화장실을 따로 만들고 옷걸이, 이불장, 티비, 서랍, 에어컨, 스탠드 등 생활시설을 구전히 갖추어 도무지 병실이라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콘도에 가까웠다. 현재 한국인병원에는 병실이 43개, 그중 고급 특실이 3개, 2인실 10 개, 3인실 5개, 외로운 노인들을 위한 5~6인실 1개, 이외 특수상황을 대비한 병실 5개를 별도로 준비해두고 있으며 나머지는 대중화된 병실로 꾸몄다. 환자들은 치료를 받는 동시에 넑직하고 밝은 병실에서 마음의 여유로움도 함께 즐기면서 가끔 짬이 나면 짧은 여행도 다녀올 수 있었다.
여기에서 새롭게 떠오른 아이디어가 “전탁건강서비스”였다. 콘도식의 병실을 아파트 임대 가격과 대등한 입주비를 받고 전문의의 지도아래 하루 삼시를 입주인의 고질병과 신체 상황에 맞추어 영양식을 제곰하며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실시할뿐만 아니라 치매나 기타 고질병의 발생을 방지하기 위해 맞춤식 운동프로그램도 실시하는 것이다. 이 아이템은 몸에 고질병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나 심장병 등 돌발성 질환을 가지고 있는 노인들이나 독신들에게 경로원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전탁건강서비스라는데 그 특수성이 있었다. 생활적인 보살핌에 앞서 우선 옆에 돌보는 사람이 없는 장기환자에게 위급한 대목을 지켜준다는데서, 그리고 아파트 임대나 별로 차이가 없다는데서 많은 호응을 얻으면서 벌써 입주인이 여럿 생겼고 주문도 끊기지 않고 있다.
한국인병원에서는 또 병원으로서 상상하기도 어려운 새로운 이벤트도 준비하고 있었다. 일단 먼저 쾌유된 환자들을 모시고 “건강회복환자연환모임”을 개최하기로 했다. 사실로 말한다는 뜻이라 하겠다. 그리고 병원 입원환자와 전탁건강센터 입주인, 재활센터 치료인 등과 사회 유지들과의 새해맞이모임도 한다는 계획이다.
청도 한국인병원은 현재 자체의 특점과 실정을 제대로 살려 나름대로 우세를 이용하여 재생의 길을 넓혀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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