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녀를 울리기 작심한 사나이
날짜 : 2007년 11월 20일 (10시 22분)
박문현 프로필
▲ 1966년 길림 교하출생
▲ 길림교하교사진수학교 졸업
▲ 현재 청도문현복장유한회사 사장
회사 고위층직원과 함께 현장에서 오더생산을 점검하고 있는 박문현 사장(중)
직녀(織女)는 천제(天帝)의 손녀라고도 전해지며, 서왕모(西王母)의 외손녀라고도 전해진다. 직녀는 은하(銀河)의 동쪽에 살면서 베틀 앞에 앉아 신기한 실로 층층이 아름다운 구름을 수놓은 아름다운 베를 짰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시간과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색깔이 달라져 '천의(天衣)'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늘을 위해 만든 의상이었다. 하늘도 인간처럼 옷을 입어야 하는데, 씻은 듯이 깨끗한 푸른 여섯 명의 젊은 선녀들이 이러한 일들을 맡아 하고 있었다. 이 여섯 선녀들은 모두 직녀의 자매들로, 하늘 나라에서 뛰어난 길쌈 솜씨를 지니고 있는 선녀가 바로 직녀였다. 직녀를 울리기를 작심하고 열심히 한 우물만 팠고 또 자체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사나이가 있다.
바로 청도문현복장유한회사 박문현(42세)사장이다.
청도에 진출해서부터 회사가 철수할 때까지 장장 10년을 한 회사에만 있으면서 기술을 철저히 익혔고 또 그런 과정에 자기의 인맥을 튼튼히 만들었다. 그리고 자기를 키워주고 아껴 주었던 회장님을 버릴 수 없어 다른 회사들에서 비교할 수도 없이 우월한 조건을 내걸고 오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그리고 자기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확실하고 철저하게 했다. 그것이 결국 그에게 큰 혜택으로 되어 그는 자기업무분야에서 명실공히 전문가가 되었다. 지금 그의 회사의 연간 수출액은 3백만 달러를 치닫는다.
(1)
1994년 박문현은 청도로 나왔다. 운수가 좋았다고 할까, 청도에 발을 들여 놓은 지 3일만에 남강복장유한회사에 그것도 사무직으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입사를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우선은 복장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도 적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중퇴하고 어려운 경제 상황을 개변시켜볼 생각에 학업을 그만두고 그 후 시종 교원생활을 해온 그에게 복장이란 너무나도 생소한 업종이었다. 다음은 외국어가 장애였다. 오더를 받아 하는 작업이라 작업용어들이 거의 모두 영어로 되어 있었는데 외국어라고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 배운 토끼꼬리만한 일어실력밖에 안돼 사무를 보려면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세 번째로는 관리방식이 너무나도 달랐다. 소학교의 관리방식과 회사, 그것도 한국회사의 관리방식은 천양지차였다.
처음 사무직으로 입사했을 때 어려움이 많았다. 외국어라고는 고등학교 다닐 때 일어를 좀 배운 것 밖에 없는 데 그것으로는 어림도 없고, 그래서 입사 3일만에 회장님에게 현장에 내려가 각 부서에서 한달씩 배우겠다고 했다. 29살에 22살밖에 되지 않는 어린 직원들한테서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회사에서는 재단 한달, 봉제 한달, 완성 한달 이렇게 돌기를 계획 잡아주었다. 재단반에서 얼마나 열심히 배웠는지 한 달이 넘어도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일 년 만에 재단 기술들을 다 배워냈다.
“만 1년이 지나니 회사에서는 저를 재단 주임으로 전격 승진시켜 주었습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지만 학창시절 워낙 공부 잘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기에 민영교원직을 할 기회가 있었다. 고등학교도 졸업 못한 선생에게 우리 애를 맡길 수 없다며 여 섯명의 학생이 전학되었다. 우수한 학생들이 다 전학한 학급을 맡아 일요일도 쉬지 않고 아글타글 노력한 끝에 6학년졸업학기 기말시험 성적이 전 현에서 3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따냈었다. 박문현의 항상 최우수를 추구하는 성격다운 결과였다.
박문현은 어린 시절 너무나도 쪼들린 가정경제형편으로 어려움을 많이도 겪었다. 부모님들의 몸은 모두가 건강하지 못했다. 더욱이 아버지는 항상 약을 달고 있다시피 했다. 부모님 약값으로 매달 200여 원씩 들어가야 했다. 민영교원 월급 65원으로 생활하려니 다섯 식솔(3남매와 부모)의 생활형편이 어떤지를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과는 달리 박문현은 남다른 성적으로 고중에 입학하였다.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아버님은 가정회의를 열었다. 동생이 고중에 붙었으니 누나가 벌어서 동생의 뒤를 대주라는 뜻이었다. 아들을 공부시키려면 부득불 딸이 학업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한번 공부를 잘 해 큰 일을 이루어 보겠다고 부푼 가슴을 안고 고등학교생활에 희망을 품었던 누님도 학교서 우수한 학생이었다. 이 돌이킬 수 없는 부모님들의 결정에 못 이겨 집에 주저앉아 한쪽 구석에 버려진 책가방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누님의 그 처연한 얼굴이 언제나 박문현의 눈앞에는 지울 수 없는 조각상마냥 각인이 되었다.
가정의 경제난으로 누님이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지만 경제형편은 여전히 낳아질 줄 몰랐다. 누님을 이어 고등학교에 입학했던 박문현은 2년도 되지 않아 자퇴하였다. 사회에 나와 일을 해서 한푼이라도 돈을 벌어 가정경제형편을 조금이나마 돌려세우고 병으로 고생하는 아버지가 약 한 알이라도 마음 편히 드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다.
병환에 계시는 아버지와 가정살림에 모진 고생을 하고 계셨던 어머님이 학교를 따라다니면서 보초를 보다싶이 하면서 그를 학업에 내몰았으나 한번 먹은 마음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기어이 고등학교를 접어두었다.
(2)
그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마을에 돌아오니 원래 공부를 잘 했던 그를 잘 알아봐주는 마을 학교에서 그더러 민영교원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학교에서는 그에게 4학년을 맡겼다. 4학년 담임교원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학부모들의 반발은 심했다. 고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사람에게 어찌 자식을 맡길 수 있느냐 하며 자녀들을 뿔뿔이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다.
눈앞이 캄캄했다. 다행히 학생이 39명까지 줄었을 때 더는 전학해가는 학생들이 없었다. 했지만 반급에서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거의 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한 다음이었다.
실망과 포기와는 담을 쌓고 사는 청년 박문현, 그는 이제 남은 학생들을 잘 가르쳐 어느 학교 부럽지 않게 공부를 시키고, 다른 학교가 좋다고 자식들을 전학을 시킨 학부모들이 후회하게 하리라고, 그리고 남은 학생들이 자호감을 느끼게 하리라고 다짐을 했다.
밤낮이 따로 없었다. 밤에는 배우고, 낮에는 가르치고, 교수가 끝나면 또 개별적으로 가르치고…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다. 학기말 시험 결과가 나왔다. 그때는 전 시적으로 통일 시험을 치를 때였다. 결과 3등, 전 시에서 3등이라는 놀라운 성적이었다. 이는 이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성적이었다. 성적은 일반적으로 학생수와 관계가 많았다. 학생이 많으면 공부를 잘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공부 잘하는 학생들의 성적을 갉아먹어 높은 성적을 따내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어떤 학교의 학생은 7, 8명 정도, 평균성적을 올리는데 더 없이 유리했다. 하지만 박문현은 그런 학교들을 누르고 전시 3등이라는 뛰어난 성적을 따냈다.
이렇게 교원생활 6년을 그는 시종 우수교원으로 장식했다.
그런 경력으로 그처럼 일에 몰두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박문현은 한국회사에 입사해서도 역시 그랬다. 입사한 지 3일만에 사무직을 내놓고 현장에 뛰어들어 불과 일 년 만에 복장공장에 필요한 기술들을 거의 다 익혔다. 재단이면 재단, 봉제면 봉제, 현장에서 대충 말 타고 꽃구경식으로 전문용어나 알고 어떻게 하는 지 작업 순서나 아는 정도가 아닌 속속들이 기술을 장악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도구를 들고 작업 다이에 마주서서 작업을 할 수 있었고 또 그것을 몇 년씩 한 사람들 보다 더 잘 할 수 있었고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1년이 지나니 사장님은 그를 재단 주임으로 승진시켰다. 그의 배움의 정신과 기술과 관리 실력에 대한 인정이었다.
하지만 난제는 있었다.
(3)
어떤 사람들은 중국의 사회는 실력위주로 돌아가는 사회가 아니라 경력위주로 돌아가는 사회라고 한다. 말하자면 경력이나 연배에는 별로 관심이 없이 실제 사업의 능력이나 실력을 중요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달리, 중국인들은 연배 아니면 입사경력, 아니면 업종에 종사한 사업경력을 중요시한다는 말이다. 그만큼 실력에 대한 인정보다 경력을 중심으로 돌아갔고 실력자들은 그만큼 사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아무리 실력자라도 아래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으면 일을 해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에 보이게 반발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서양사람들이나 자본주의나라의 노동자들은 눈에 보이게 반발한다. 중하면 데모를 한다든지, 경하면 면전에서 대든다든지 아니면 따지고든다든지, 그만큼 눈에 띄이기에 처리하기는 쉬운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았다. 자기 상사가 모르는 부분을 꺼내들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도전장을 걸어오는가 하면 상사의 실력으로 그렇게 할 수 없을 경우, 일에서 늑장을 부린다. 늑장을 부려도 처벌을 받을 정도로 부리는 것이 아니라 딱 일을 완성하지는 못하나 처벌을 받지 않을 만큼 부린다. 그러니 일에 지장이 가지만 어떻다고 꼬집어 말할 수 없고, 왜서냐 물으면 맞춤한 이유를 만든다.
중국에 진출한 회사들이 현장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부분이기도 하다.
박문현이 금방 재단주임으로 승진했을 때 아래 사람들의 반발이 없을 수 없었다. 몇 년을 해도 여전히 일반 기술직, 승진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일년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주임으로 승진할 수 있는가, 실제 주임 실력은 가지고 있는가… 처음 직원들은 잘 따라주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어느 때는 꼭 회사에 차질을 빚어올 것이라 믿었다.
더 늦추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박문현은 기술, 작업, 관리 여러 면에서 자기의 실력을 충분히 보여준 다음 골간 기술자들을 불렀다.
그리고 최후통첩을 내렸다.
“나를 주임으로 승진시킨 것은 회사의 결정이니 회사의 결정을 따르려면 나와 합작을 잘 하고 따르지 않으려면 다른 회사로 가든지 하세요.” 그리고 그는 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자기가 할 일을 했다. 한동안 지나니 모두들 잘 따르고 합작을 잘하겠다고 했다.
(4)
박문현은 남강복장유한회사에 입사해 현장작업에서 기술, 관리를 하나하나 익히면서 열심히 일했다. 유혹도 많았다. 청도에 진출한 한국복장업체들이 많았으나 복장기술이나 관리, 그리고 복장전문용어를 잘 장악한 인재들이 극히 드물었다. 이 회사, 저 회사, 지어 남강복장유한회사의 파트너회사들에서까지도 그에게 우월한 조건으로 초빙을 원했지만 그는 아예 노임이나 대우같은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하나는 회사에서 자기에 대해 너무나도 좋은 대우와 편리한 사업환경을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철저히 배우자는 욕심에서였다. 이는 쌍방에 다 이로운 일이었다. 열심히 배우고 일을 하니 회사에 많은 이익과 도움을 주었고 따라서 회사에서는 필요한 여건과 환경을 마련해 주었고 또 그렇게 하니 회사와 자기 개인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었고 또 그만큼 기술도 익힐 수 있어 회사와 개인은 양성순환( 性巡環)을 거듭했다.
그때 남강복장유한회사의 회장님은 여 섯개의 공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국에 네 개, 청도에 복장회사 하나와 콘크리트회사(레미콘)를 하나 가지고 있었다. 남강복장유한회사에서 박문현 사장은 계장으로 있으면서 기술과 업무관련 사무를 거의 전담하다시피 했다.
박문현이 남강복장유한회사에 입사한지 3년 되던 해, 회장님은 한국으로 연수를 보냈다. 그리고 한국의 4개 공장을 하나하나 돌아다니면서 견학을 시켰고 현지 책임자들을 소개해주었다. 놀라운 것은 회장님이 소개할 때마다 박문현을 “앞으로 청도공장 공장장을 할 사람이오.”라고 높여 소개해주었다.
몇일간 견학이 끝나자 회장님이 무엇을 배우는 게 소원인가 물었다.
“디자인을 배우고 싶습니다.”
박문현은 복장 디자인을 철저히 배우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에로 연수를 갈 때부터 이번 길에 복장디자인을 확실히 배우리라고 마음 먹었다.
회장님은 인차 그에게 전문인원 한명을 붙여 복장디자인을 배워주도록 했다.
10여년 전, 그때만해도 한국회사에서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나간 조선족들이 많이 잠적을 해서 돈벌이를 하는 일이 거의 회사마다 발생할 때였다. 회사에서 연수로 보내면 돈을 들이지 않고, 잠적을 해서 불법체류자로 일을 하면 한국 나가는 경비 인민폐로 10만원 정도 남기는 밖에 한 달에 적어도 만원은 번다. 그러면 몇 년만 일을 착실히 하면 부자가 되어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다.
하지만 박문현은 잠적이나 돈벌이 같은 것은 아예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꾸준히 자기가 배울 것을 확실히 배우기만 했다.
3개월간 배우고 중국으로 들어왔을 때, 그는 이미 복장 디자인 전문가였다.
청도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배움을 멈추지 않았다. 낮에는 회사 일을 보고 회사 일을 보는 여가에 영어학원을 다녔고 경영관리를 배웠다.
이렇게 그는 남강복장회사에서 10년간 말 한마디 없이 꾸준히 일을 하기만 했다.
(5)
2004년 박문현 사장은 드디어 자기의 사업을 시작했다. 복장회사를 오픈했다. 자기가 가장 익숙히 알고 있는 분야에서 자기가 확실히 할 수 있는 사업을 시작했다.
회사를 해서 첫번째 일이 바로 인재를 양성하는 일이었다. 믿음직하고 배우기에 마음을 두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골라 회사의 장래를 위해 비축해두었다. 그리고 청도에 널려있는 인재들을 불러들였다.
그만큼 직원들에 혜택도 많이 돌렸다. 그만큼 직원들도 사장을 따랐다.
회사는 회사와 사장, 직원들이 그 실적과 확장에 따른 혜택을 공유할 때만이 조화로운 발전을 할 수 있고 인재를 확보할 수 있고 회사는 성장을 거듭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 중 박문현 사장과 가장 오래 따른 직원은 이미 13년이나 된다. 19세 낭낭소녀로부터 박문현 사장과 함께 한 회사서 일하기 시작해서 지금 서른이 넘어 엄마가 되었지만 박문현 사장을 따라 일을 한다. 5년경력을 가진 직원도 있고 3년경력을 가진 직원은 수두룩하다. 오너를 따르는데는 그만큼의 매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그만큼 손이 맞았고 일이 척척 잘 진행된다. 현장과 업무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한번 눈길만 서로 마주쳐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사장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사장이 한번 현장을 돌면서 지나가도 직원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장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시키지 않아도 찾아서 한다.
관리학자들은 직원과 사장사이의 교류를 세가지 경우로 나누고 있다. 교류해도 통하지 않는 경우, 교류하고 말을 해야 통하는 경우, 교류하지 않고도 통하는 경우, 그 중에서 교류하지 않고도 통하는 경우가 최선이다. 서로 일을 마주하면 말을 하지 않아도 어떻게 해야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말로 쉽게 한다면 마음이 통한다는 말이다.
“사장과 간부들은 마음으로 통해 돌아가야지요.”
시키면서 일하자면 끝이 없다. 서로 피곤하고 서로 마음이 막히고 서로 부담이 되면서 일이 잘 될 수 없다.
그래서 문현복장유한공사는 언제나 제품 관리와 기술관리에서 철저했고 바이어들과의 신용 또한 돈독했다. 대부분 일본과 미주쪽의 오더를 받아 하는 일이고 블라우스(미주오더)와 캐미숄(일본오더, 10대~30대 사이의 시체옷)을 주로 하지만 불량으로 바이어들의 원망을 듣는 경우가 없으며 납기를 어길 때는 더구나 없다.
그래서 회사의 실적은 상승선을 긋기만 한다.
지난해 문현복장유한회사의 수출실적은 200만 달러를 넘겼고 금년에는 300만 달러를 목표로 달린다.
직원들에게 기금제도를 도입하여 매달마다 회사에 직원기금이 적립되게끔 하였다. 월급 잔액 일원을 모아 놓으니 몇 천원이나 되었다. 최근, 재단반에서 근무하는 사천성인 여직원이 풍을 맞아 얼굴이 비틀리는 현상이 일어났었다. 이 기금으로 병을 치료해주니 평소에 기금의 중요성을 몰랐던 회사직원들은 한결같이 놀라와 했다.
사회에 좋은 일도 여러 번 했었다. 2006년도 청양구 <문현컵>소수민족 운동대회에 협찬금만 해도 3만여 위안. 대학생연합회에도 ,전국조선족축구대회에도, 청도조선족소학교에서 학생작문을 출간하는데도, 2007년 청도소수민족민속절에도, 청도조선족의 행사에는 빠짐이 없이 참가하는 박문현 사장이 하는 말이 있다. <돈이 많아서 내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만큼 마음이 소중한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 자기의 기술을 꾸준히 익혀 실력을 키우고 직원들과 함께 회사의 성적을 공유하면서 직원들과 회사를 함께 키워가는 스타일, 그것이 바로 직녀를 울리기 작심한 사나이가 은하수를 가르면서 烏鵲橋에 사랑과 사업이라는 두 나무를 계속 심고 있는 원인이 아닌가 보다.
/ 김명숙 특약기자, 홍군식 특약기자
Comment Canc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