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백속에 세계를 집어넣고
 
날짜 : 2007년 07월 02일 (07시 35분)    
 
 
 
좁은 공간을 메우는 비밀의 창고
핸드폰, 립스틱, 지갑, 키들이 모여
잠을 자고 속삭이고...
주인과 희로애락을 나누는
영원한 지기
늘 비어 있으면서
속에 다른걸 집어넣을 음모만 꾸민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
가방 속에 가방을 넣어도
가방은 싫다 하지 않는다
                                 -<백(BAG)의 자세>에서
 
박춘림 프로필
▲ 1970년 내몽골 후룬베이얼 태생
▲ 청도이연피혁제품유한회사 대표
▲ 청도조선족기업협회 이창구지회 부회장
1995년 초반, 향정부 공무원자리를 박차고 연해도시행을 택했던 이연산업의 박춘림(38세)대표. 7년이 지난 오늘 그는 300명 직원에 연 임가공비 700만위안을 창출하는 가방공장을 경영하고 있다. 병마를 스스로 이겨내고 당시 향정부 우수공무원으로 사업했던 부친보다 더 훌륭한 사업을 해보겠다는 욕심이 당초 고향을 떠난 원인이라고 박 대표는 말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300여명 직원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초창기부터 꾸준히 그를 따랐던 관리층의 앞날을 책임지는 것이 더욱 큰 목표이자 사명감이라고 박 사장은 덧붙였다.
◆ 공장 경비실에 사장실을 두다
현재 일본과 한국에 LOCK & LOCK 등 유명 브랜드 백을 납품하고 있는 박 사장은 하층 공인으로부터 시작해 한발 한발 커온 ‘자수성가형’(自手成家型)기업가이다. 그래서인지 박 사장은 지배인이라는 틀을 차리지 않는다.
취재차로 청양구 와리공업단지내에 위치한 이연산업 공장을 찾았을 때 박 사장과의 첫 대면장소가 바로 이 경비실이었다.
"사무실을 경비실에 둔 사장님을 처음 뵙습니다." 취재진이 반농담조로 하는 말에 박 사장은 "워낙 시골 출신이라서 이곳이 더 편합니다."라고 농담을 받아들였다.
후에 알아 낸 일이지만 박 사장이 경비실에 사무실을 두게 된 것은 남다른 노하우가 있었다.  워낙 밑바닥 공인으로부터 출세한 박 사장은 하층 직원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사장이 향락을 즐기면 직원들도 따라서 책임감을 잃기 마련이라는 것. 그리고 공장 입구 경비실에 사무실을 둔다는 자체가 공장에 들이닥치는 곤란을 사장이 앞장서서 막아낸다는 함의도 내포돼 있었다. 이같은 원칙의 추동하에 박 사장은 골프나 도박 등에 전혀 손을 대지 않는다. 다만 평소 단련운동으로 축구를 즐길 뿐이다.
박 사장과의 만남에서 또 한가지 인상 깊은 점이라면 그의 명쾌하고 시원시원한 성질이다. 숨기거나 복선을 깔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곧바로 동의를 구하는 직설형. 그의 몸에서는 관료출신이라는 점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권위적인’분위기를 찾아볼 수가 없다.
스스로 몸을 낮추는 자세도 눈길을 끈다. 아마도 영업이 몸에 밴 탓인 듯 했다. 온화하고 자상한 스타일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비전을 쏟아내는 모습은 나이를 잊은 듯 열정적이다.
사업을 시작한지 7년 조금 넘었지만 시장분석, 영업에 대한 감각과 조직관리, 사업비전 등을 쏟아내는 모습은 영락없는 베테랑CEO다. 노련하기 그지없다.
이연산업은 2000년 설립 이래 지속적으로 한 바이어를 주축으로 백을 제공했다. 지난해 600만위안, 올해에는 700만위안의 가공비를 창출할 계획이다.
◆ 리더를 꿈꾸다
내몽골 출신인 박춘림씨는 학창시절에 공부도 무척 잘했다. 지망하고 있는 대학을 바라보며 밤을 패가면서 공부도 했고 자신의 꿈을 그려보기도 했다. 그러나 운명의 조화 앞에서 사람의 힘은 너무나도 미약했다.  갑자기 들이 닥친 다리질병에 박춘림씨는 하마터면 장애인으로 일생을 말아먹을 번했다. 다리에 분포된 혈관이 탄성을 상실해 혈액수송이 정상화 되지 못하는 병이다.
이곳저곳 좋다는 병원을 다 돌아다녔지만 진단결과는 하나, 다리를 잘라야 된다는 것이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그는 자칫하면 삶의 용기를 잃을 번했다. 꿈이 깨지는 순간 세상에 대한 저주감이 앞서더란다.  게다가 심해지는 아픔과 몰래 찾아드는 고독감이 그의 젊은 시절을 어둡게 만들었다.  다행히 집사람들의 관심이 박춘림씨의 의지를 지탱시켰고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그에게 새로운 삶을 엮어 주었다.
당시 불치병으로 간주된 다릿병이 토정비결의 세례로 치료가 가능해 졌다. 비록 지금도 짜릿한 아픔을 겪을 때도 있지만 장애인으로 전락되는 신세는 면한 셈이다. 젊은 시절에 겪은 병마와의 도전은 향후 박춘림씨의 창업사에 튼튼한 심리적 기초를 닦아 놓았다.
질병과의 겨룸은 그의 대학입학 꿈을 느닷없이 빼앗아 갔다. 고졸을 마친 박춘림씨는 당시 향정부 우수공무원으로 사업했던 부친의 덕분에 향정부 농업세관리부서에 공무원으로 배치됐다. 그러나 하루가 멀다하게 들이닥치는 지긋지긋한 술장소와 굳어 버린 출근자세가 그에게 배척심리를 심어주었다.
1994년 봄, 박춘림은 깊은 고민에 휩싸였다. 공직사회에 대한 강한 회의와 부친의 그늘 밑에서 살아가는 것만 같은 무기력함, 당시 그의 생각은 번잡했다.
박춘림씨의 부친은 정부 부문에 장장 30여년동안 몸과 마음을 바친 분이다. 그 원인으로 3차나 전국노동모범으로 당선된 적도 있다. 따라서 부친의 영향이 없었더라면 박춘림씨도 정부공무원 대오에 가담할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그의 부친은 글도 잘 쓰고 학식도 깊었다. 이러한 아버지에게 박춘림은 자신을 증명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슬하를 떠나도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자신을 찾고 싶었던 것이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공무원 자리에서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사실 운이 좋아서 향장이 됐더라도 그 역시 자신의 능력이 아닙니다. 조직내부로부터 우러나오는 존경을 받지 못하면 그건 실패한 인생입니다. 단순히 주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5년간 향정부 공무원 생활을 하는 동안 박춘림씨는 단행본 한권 읽지 못한 자신을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했다. 지식을 기반으로 실력을 쌓고, 이를 통해 비전을 제시하는 리더가 돼야 하건만, 자신 역시 선배들과 다를 바 없이 인맥을 통한 리더밖에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1994년 4월, 박 사장은 5년의 공직생활을 끝내고 향정부청사를 나섰다. 경영인으로 변신하는 것이 당시의 동경이고 꿈이었다.
그러나 관료시절에 아무런 수학 없이 무의미하게 지나버린 것은 아니다. 공무원 자리에서 5년간 쌓은 인적네트워크는 박춘림씨의 훗날 CEO생애에 큰 작용을 일으켰다. 늘 겸손하고 모나지 않게 처신했던 대인방법. “공무원답지 않다”는 말을 가끔씩 들을 만큼 낮춘 자세 등은 훗날 사업 성공의 큰 밑천이 되었다.
◆ 정글의 법칙, 죽음 같은 2차 인생경력
첫 대학 입시에 7점 차로 소원을 성취하지 못한 아쉬움, 희망의 씨앗을 품고 공부에 전념하려던 찰나 느닷없이 들이 닥친 병마, 고통을 이겨내며 1년 반을 병마와 싸워온 인생 경력, 아버지의 그늘을 떠나 자아가치관을 수립하려는 포부, 이같은 박춘림씨의 인생흐름은 그의 벼랑끝 인생을 돌변시켰다.
고향을 떠나 목적 없이 떠돌던 중 최종 정착한 도시가 청도다. 한국회사에서 공인으로 일도 해봤고 통역이나 관리직에도 머물러 보면서 부지런히 리더십을 키웠다. 그에게는 고향을 떠나면서 세운 목표가 있었다. 3년 내에 발전방향을 잡는 것이다. 연해도시 진출 3년째 되던 1997년, 박 사장은 자가와의 약속을 지켰다. 차곡차곡 모은 돈 3만위안을 밑천으로 자그마한 가방회사를 만들었다.
눈도 많던 1997년말 겨울, IMF의 공황에 빠져 엉망이 된 회사를 들여다보면서 박춘림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꽁꽁 얼어붙어 침체된 경기 탓에 오다가 뚝 끊기면서 그의 1차 창업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기점은 또다시 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그한테 남은 것은 회사관리 경험이다. 한국가방회사에 다시 취직하면서 그는 경력우세로 매달 600달러의 높은 봉급을 받았다. 그러나 IMF영향으로 그 회사도 오다가 많지 않았다. 멀쩡하게 놀면서 봉급을 타는 격이었다. 이렇게 놀고만 있다간 허송세월을 보낼 것만 같았다. 재기를 위해 뭐든지 해야 한다고 생각한 박 사장은 발걸음을 다시 고향으로 옮겼다.
이번 귀향길에 박 사장은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다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정리해낸 경험, 즉 세인의 비웃음을 당하면서도 떳떳이 살아갈 수 있는 인내성을 양성하는 것이다. 돌아가자 바람으로 그는 자그마한 옷가게를 꾸렸다. 시골 아낙네들과 함께 시장을 누비며 옥신각신 다투기도 하고 소리 높여 장사도 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곳이라 그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향정부 공무원자리를 뛰쳐나갔던 사람이 결국 구멍가게에서 생계를 유지한다는 둥, 아버지 얼굴에 먹칠한다는 둥 별의별 비난이 다 있었다.
이러한 경멸을 당하면서도 박 사장은 추호의 주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힘든 일을 찾아했다. 심지어 꼬치구이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1년간의 마음 단련을 거친 박 사장은 힘과 용기가 생겼고 세상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사업가로서의 심리기초를 닦은 거나 마찬가지다.
이듬해 1월1일 박춘림씨는 재기의 꿈은 안고 재차 청도에 도착했다. 구정을 보내고 떠나라는 집사람들의 권도도 마다한 채. 여직 창업을 반대했던 부친도 이날은 무언의 승낙을 했다. 그의 끈질긴 의지에 감동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1년 후의 청도는 현저한 변화가 없었다. 변한 것은 박춘림 사장의 마음이다. 사업에 입문하자마자 구원투수로 나설 수밖에 없었던 박춘림은 본인 스스로도 믿기 어려운 조직력과 출중한 경영능력을 발휘하며 회사를 재기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 세운 회사가 바로 지금의 이연산업이다.
공직생활을 통해 터득한 기획력과 매크로 시각, 특유의 돌파력은 위기상황에서 결단을 내리게 한 큰 동력이었다. 2차의 어처구니없는 회생프로그램은 박춘림으로 하여금 CEO로서 겪어야 할 과정을 최단기,  최악의 코스로 만들어준 셈이 됐다.
이것은 박춘림이 후일 이연산업의 탄탄대로를 있게 한 중요한 경영노하우와 스스로의 잠재력을 일깨우며 CEO로 급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피하지 않고 정면 승부를 걸었던 그는 결국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내며 회사를 재기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역시 CEO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됐다.
상황이 좋을 때 더욱더 매진해 퍼텐셜과 자금력을 확보,  글로벌기업으로 우뚝 서야 한다며 숨돌릴 틈도 없이 몰아세운다.
◆ '바닥론', 그만의 놀라운 영업노하우
박춘림 사장의 영업핵심은 밑바닥부터 기어야 한다는 ‘바닥론’이다. 말단부터 섭렵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설령 튼튼한 인맥을 구축했다하더라도 그걸 자본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실무부터 착실하게 다져야 합니다."
그는 그래서 직원들에게 고객사 생산라인 현장의 오퍼레이터 여직원들에게 얘기를 들으라고 주문한다. 뭐가 불편한지를 현장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지론이다.
“고객이 불편하면, 아무리 위에 얘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직접 쓰는 고객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영업은 아무 소용없죠." 한국과 일본 업체에 백을 납품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특유의 밑바닥 영업마인드 덕분이다.
“내가 안 뛰면 300명 직원이 죽습니다. 가족까지 합치면 1000여명입니다. 나 혼자 머리 굽히면 1000여명이 사는데, 그까짓 자존심, 전혀 문제없죠. 몇 번이고 숙이죠."
박춘림 사장 영업의 또 다른 비밀무기는 ‘인맥’이다. 그는 그간 쌓아온 인적 네트워크를 ‘보물’에 비유한다. 하지만 인맥을 활용하는 그의 방식은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는 절대 자신의 인맥을 노출하지 않는다. 만약 고객사에 영업을 나가더라도 밑바닥 대리부터 만나 영업을 할뿐, 절대 고위층을 내세우지 않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엔 고객사 실무진이 먼저 “사장님, 왜 사전에 얘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저희 윗분과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사전에 말씀하셨으면 더 빨리 진행됐을 텐데요”라고 되묻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박 사장의 생각은 확고하다. “먼저 얘기했다고 하면, 절대 납품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경험적으로 알죠. 하지만 반대편에서 어떤 경로로 나중에 알게 되면 그 효과는 몇 배가 됩니다”
철저히 한단계씩 밟는 스타일이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에게 직접 부탁도 절대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핵심 인맥, 그리고 담당자들이 진정 뭘 원하는지를 파악하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상상을 뛰어넘는 일들을 직접 발로 뛰며 챙긴다.
“누구누구를 안다고 떠벌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입니다. 보물은 혼자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도 알고, 나도 알면 그 것은 이미 보물이 아닌 거죠.”
◆ 박춘림의 성공론, 그리고 화려한 꿈
“앞으로의 계획은 직원 150명 규모의 견실한 자회사를 여러개 키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핵심멤버들이 하나씩 맡아 이연산업지주회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할 생각입니다.”
박춘림 사장은 초창기 멤버들을 모두 사장으로 키워내는 게 소원이자 목표라고 한다. 그리고 그들을 묶어 가방생산그룹을 만들려는 꿈을 키우고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박 사장은 지금부터 부지런히 직원들의 실력 향상에 신경을 기울인다.
그는 유능한 후배들에게 과감히 권한을 물려주고, 경영을 맡기고 있다.  따라서 그가 내세우는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는 리더의 덕목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리더론’을 제시한다. 그 리더론의 근본은 ‘희생정신’이다.
“사장이 욕심을 내면 안됩니다. 혼자 돈 벌겠다고 생각하면 끝입니다. 사장이 솔선수범해야 하고 가장 많이 일해야 합니다. 그래야 직원들이 믿고 따릅니다.”
중소기업은 직원이 자산이기 때문에 CEO가 솔선수범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절대 조직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원칙을 지키는 것도 솔선수범해야 한단다.
두번째로 꼽는 성공론은 ‘열정’이란다. “모든 직원들의 열성을 불러 일으켜 딴 생각 없이 사업할 수 있도록 시스템과 신심을 심어주는 거죠." 박 사장의 말이다.
세번째는 ‘즐겁게 일하는 것’이란다. “늘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긍정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하다 보면 만족도, 성취도가 높아집니다.”
박 사장은 직원들에게 늘 세가지를 주문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과 ‘시스템적으로 생각하라’, 그리고 ‘전략적으로 사고하라’ 등이다.
이러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기에 박춘림 사장과 동고동락 했던 초창기 멤버들은 그를 믿고 따르며 함께 커간다.  이연산업에서 가면 직원들 속에서 한가지 화제가 돈다. 박춘림 사장이 사재를 털어 두 공장장에게 각기 집과 차를 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여전히 빵차를 몰고 다닌단다는 것이다. 
이연산업의 박춘림 사장, 그는 공직생활에서의 노하우와 인맥, 매크로 시각을 비즈니스에 절묘하게 접목시키면서 뛰어난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열정의 벤처기업가였다.
                           

 /홍군식 특약기자, 이성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