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비우면 그릇이 커진다
날짜 : 2007년 07월 22일 (23시 42분)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라는 인터뷰코너에서 주인장 노릇을 하고 있는 홍군식, 이성국입니다. 
2007년 6월17일 '안씨화로' 안금산 사장을 필두로 시작된 <사람들> 인터뷰가 2개월을 맞았습니다.
인터뷰를 한 사람이 다음 인터뷰대상자를 선정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견지할 20회는 늘 예측할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했습니다.
<사람들> 인터뷰코너는 눈물겨운 고난기와 각양각색의 창업스토리를 통해 성공의 길이 얼마나 고단하고 힘든지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또 경영인의 마음가짐과 회사의 비전이 어떠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지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에는 교남에서 청도천원복장유한회사를 경영하는 유장록 사장을 주인공으로 모십니다. 20대 초반에 벌써 식품공장을 경영해 내수시장 개척을 했던 유 사장은 장사라는 개념을 이익창출과 연결시키기 전에
우선 개인적인 취미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 이색적입니다.
아래 그의 창업사를 이야기로 전해 드립니다.
유장록 프로필
▲ 1967년 흑룡강성 오상시 태생.
▲ 청도천심복장유한회사 동사장
▲ 현재 청도조선족기업인협회
    교남지회 지회장
청도천원복장유한회사 유장록(41세) 사장. 늘 친화력으로 주변사람을 매료시킨다는 수식어가 따르는 스타일이다. 현재 임가공 형식으로 한국 삼성제1모직에 ALLFORYOU, Samsung, Crocodile, Pat, Manstar, Parkland 등 고급브랜드복장을 납품하고 있는 천원복장은 청도복장업계에서도 몇집 안되는 기술형 벤처기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만큼 유 사장의 인간적 됨됨이가 까다롭기로 소문난 한국 고급복장업계 바이어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다는 증명이다.
유장록 사장은 그만의 독특한 사업사이클을 갖고 있다. 하는 사업마다 늘 최고를 고집하고, 늘 먼저 신천지를 개척한다. 그리고 관련시장이 활성화 돼 후불주자들이 대거 뛰어들 때면 그는 어느새 또 새로운 업종 개척에 나선다. 이는 유장록 사장이 시장을 내다보는 뛰어난 감각과 모험을 취미로 간주하는 도전적인 마인드를 가진 CEO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교남에 위치한 천원복장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캐주얼복장차림에 형식에 억매이지 않는 인사, 주위 눈치를 아랑곳 하지 않는 걸걸한 성격의 소유자인 유장록 사장과의 첫 대면에서 그의 친화력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스스로 중심을 갖고 자신만의 컬러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자유분방한 CEO라는 점도 어느 정도 감안했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필자는 달변하면서도 논리 정연한 유 사장의 답변에 섬세함도 깃들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복장의 흐름과 대세에 대한 감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
◆ 복장과의 인연
지난 2004년 복장판매 대리점으로 출발해 지금은 160명의 직원을 둔 복장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유장록 사장은 직접 복장을 만드는 재봉사도 아니요, 복장디자이너도 출신도 아니다. 그런 그가 복장브랜드의 지킴이로 변신하게 된 데는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
시골에서 자란 유장록은 어릴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장사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혁개방전부터 유 사장의 부친은 고향의 특산품인 약재를 가지고 상해, 광주 등지를 다니면서 당시에는 구하기 힘든 상해표 손목시계 등을 바꿔오는가 하면 홍콩상인들을 접촉하면서 전자손목시계도 약재로 바꾸어 내지에서 판매했다. 눈으로 익혀온 것이 바로 아버님의 뛰어난 장사솜씨였다.
유 사장의 인생은 아버지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유장록은 비록 공부를 잘했지만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않고 89년도에 24세 한창 젊은 나이에 흑룡강에서는 최초로 하얼빈에 김치공장을 앉혔다. 당시 하얼빈시의 김치시장을 거의 독점할 정도로 악착스레 겨레의 자랑인 김치를 슈퍼마켓, 역전 등에 판매하였다.
유감스럽게도 5년 동안 김치공장을 경영해 벌어놓은 돈이 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시름시름 앓으면서 치료비로 굽이 났다.
새로운 테마가 유장록을 불렀다. 그때가 바로 1993년. 한창 러시아무역이 붐을 이룰 무렵이다. 그는 친구와 손잡고 중국과 러시아의 변경인 수분하에서 복장을 구입해 러시아에 가서 판매하였다. 새로운 장사에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을 때 어머니가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다. 장사한지 수개월 만에 유 사장은 부득불 장사를 접지 않으면 안 되었다.
6살 때 생모를 잃고 친어머님 못지않게 곱게 키워준 양어머니를 지극히 사랑했던 유 사장은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병원에서 간호에 들어갔지만 8개월 만에 두 번째로 친인을 잃는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잇따라 닥치는 불행은 그저 유 사장을 강인하게만 만들어 가고 있었다.
◆ 거칠 것 없는 세월, 잇따른 1호 기록
어머님이 세상 뜬 후, 개혁의 물결이 거품 없이 세차게 일고 있었다. 새로운 기회가 주어졌다고 생각한 유장록은 건축업계에 발을 들이밀기 시작한다.
1994년, 금삼각이라고 불리는 길림성 훈춘시, 대략의 아파트, 빌딩들이 하루아침사이에 우뚝우뚝 솟아오르고 있었다. 하북성에서 유리를 구매하여 기차로 도문을 거쳐 훈춘까지 운반하였다. 유장록으로 말하면 분명 새로운 시장, 새로운 개척지였다.
재치 있는 기획이었지만 러시아 경제의 불경기가 금삼각 부상의 꿈을 산산히 조각내고 말았다. 엄청난 경제손실이 눈앞에 닥쳐왔다. 밑천까지 바닥날 정도였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면 견디기 어려운 사실이다. 당시 10만위안이란 돈은 장난이 아니었다. 실패의 고배를 또 한번 삼키게 된다.
산 사람을 죽어라는 법은 없다. 사촌형의 연줄로 베이징에서 새 생활이 시작된다. 와이프와 함께 베이징에서 작은 옷가게를 꾸렸다. 유 사장이 광주나 위해 등지에서 구입한 옷을 와이프가 베이징에 꾸린 가게서 판매한다. 95년 말까지 장사를 쭉 해왔지만 경기가 좋지 않았다. 별 다른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발을 맞추면서 지긋지긋한 생활을 영위할 뿐이었다.
그때 마침, 청도에 진출한 여동생의 호출을 받았다. 청도에 한국인과 조선족이 점차 모여들고 있는 상황이니 장사도 잘 되지 않는데 청도에 와서 음식점이나 꾸리라는 것이다.
1996년 3월, 베이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연해도시에 진출하였다. 청도에 첫발을 들여놓은 고장이 바로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는 교남이였다.
음식점을 하자면 하객들이 많아야 된다는 것이 유 사장의 첫 사업적 감각이다. 한번은 시장조사를 위해 교남시에 있는 큰 상점들을 돌아다녀 보았는데 평일이여서인지 상점에 고객이 유 사장을 포함해서 4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점에 대한 열정이 폭등하였다.
하는 수 없이 교남에 갓 입주한 한국회사인 광명복장에 입사하였다. 복장에는 뛰어난 감수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입사 2개월 만에 자재부 과장까지 승진하였다. 1999년까지 회사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3S운동으로부터 인원관리, 자재관리, 인맥관리 하여튼 생소한 복장언어까지 모든 것을 무조건 머릿속에 건사하였다. 그러나 자유와 도전을 즐기는 성격의 소유자인 유 사장은 남의 밑에서 눌러있을 수만 없었다. 재차 베이징에 옷가게를 재기시켰다.
다시 시작되는 원시자금 축적이다. 언젠가는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싶다는 유 사장의 욕심작이기도 하고 유 사장의 사업모델이 어느 정도 파워풀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베이징에서의 재기는 그에게 사업을 크게 할 수 있는 자금력을 마련해 주었다. 곧바로 사업 확장에 들어갔다. 주위에서는 조심성 있게 사업을 추진 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그는 더욱 규모를 키우며 도전했다. “대기업들이 자금력측면에서 유리하겠지만 저는 정확한 시장흐름 파악과, 정규화 된 경영시스템을 갖추는 것으로 또 다른 차원의 경쟁력을 꾀했습니다.”
그랬다. 그는 공장에서 집적 옷을 생산하여 러시아에 수출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실패의 액운이다. 14만달러란 돈이 깨질 줄을 그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판로의 미로에 빠져 들어갔다. 적자의 붉은 신호등이 유 사장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때 인생경력은 필경 후일 창업에 필요한 도움을 많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와중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 묻혀진 이야기, 정부의 견인차 운명
2001년, 한국 삼성제1모직회사에서 중국진출을 시도하였다. 대련일까 청도일까 선택할 때 마침 유 사장에게 그들을 설득하는 기회가 생기였다. 그의 친화력이 역할을 발휘하였다. 삼성제1모직에서 교남에 정착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성공의 첫발자국을 내 디딘 셈이다.
따라서 삼성모직에 납품하기로 하고 지난해 유 사장은 청도 복장업계에서 찾아보기 드문 명품복장만 생산하는 천원복장회사를 설립했다. 불과 일년사이 그는 확고한 품질과 신용으로 연간 십만장의 고급복장을 납품하는 벤처기업으로 성장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수출액은 약 600만달러이다.
◆ 대결단, 홀로서기의 계절
99년 가을, 유장록은 무거운 마음으로 몇일밤을 고민했다. 3년간 회사생활을 해오며 내린 결론 때문. 사업의 성공열쇠는 자금력이었다.
유 사장은 어느덧 한국회사에 대한 사업적 흥미를 점점 더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더 이상 회사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나를 설득해도 소용없습니다. 전 이미 떠나기로 작심 했습니다…”
99년 11월, 유장록은 정식 광명복장에 사표늘 냈다. 또 한번의 도전을 결심했다. 유 사장은 사업아이템을 정하는 것을 순전히 ‘느낌’으로 정한다고 한다.
“전 ‘느낌’이라 생각해요. 될 것 같은 느낌이 옵니다. 김치공장을 할 때도 그랬고, 땡 팔이 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는 ‘복장’이란 말에 순간 강한 느낌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그는 복장판매와 복장임가공이 인접한 분야이고(나중에 사업을 해봤더니, 전혀 다른 분야였다고 부연설명), 본인이 잘 아는 분야라고 생각했다.
“그만둘 무렵엔 정말 재미가 없었습니다.” 2005년 말부터 그는 교남에 자기의 복장회사를 꾸릴 준비를 다그쳤다.
삼성제1모직 청도 진출 시 쌓아 놓은 인맥이 그의 사업인맥이 됐다. 유장록의 이름 하나가 브랜드가 된 것이다. 현재는 자본금 80만위안 규모로 늘어났으며 대규모 실탄을 확보했다.
’유장록’라는 개인브랜드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 유장록의 침잠(沈潛), 그리고 나오는 말
사실 유장록은 초창기 매주 직원들에게 강연과 교육을 강구했다. 복장이 무엇인 지를 강연하고, 가르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직원확보와 복장 임가공확산을 위해 어쩔 수 없었다.
강연을 통해 복장 대세론을 끝없이 펼쳤다. 하지만 유장록은 최근 들어 조용하기 그지없다. 그 이유를 들어봤다. 천원복장을 이끌면서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란다. “사업에만 집중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코멘테이터(commentator.해설자)역할은 안하기로 작심했어요.”
해설자로서의 역할이 산업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물론 그동안의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다. “훈수는 쉽습니다. 하지만 자기반성 없이 남 얘기를 너무 쉽게 한 것 같아요. 너무 쉽게 얘기한 것 아니냐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걸 절감합니다. 점점 소심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정리한다. “전 30대에 코멘테이터 역할을 참 많이 했습니다. 고민을 많이 하지않은 상태에서 많이 한 것같아요. 이젠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고 싶습니다”
하지만 패션에 대한 그의 확신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사람들의 생활이 점점 나아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먹는 걱정 없을 때에는 입는 것에 신경이 많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깐 패션은 대세입니다. 앞으로는 임가공만 아닌 우리 자신이 복장 디자인도 하고 직접 우리 손으로 자신의 복장을 만들고 싶어요.”
패션열풍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단호하다. “패션열풍에 대한 반성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하지만 일방적인 매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는 벤처캐피탈들이 시류에 편승, 냉온탕을 왔다갔다한 것도 판단기준이 없어 생긴 일이라고 지적한다.
유장록, 이 땅에 <마음을 비우면 그릇이 커진다>는 진리를 보급시키고 있는 멋있는 사나이. 유장록 사장은 여전히 앞선 사업 감각으로 오늘도 신천지개척에 온 몸을 던지고 있는 진정한 모험기업가였다.
                            

 

/홍군식 특약기자, 이성국 기자


67년 생. 학벌을 중요시 하지 않는 멋쟁이,
매우 호탈하고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매우 치밀하고 논리 정연하다. 합리적이고 친화력이 뛰어나다.
운동: 골프(골프를 토요일오전에 하고 일요일은 절대하지 않는다. 주말은 반드시 가족과 보낸다)한달에 2회쯤은 조깅을 한다.
10년 후 모습: 사업은 아니고,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