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는 나이가 없다
날짜 : 2007년 11월 25일 (20시 06분)
이용군 프로필
▲ 1965년 길림성 왕청시 출생
▲ 현재 연운강 포남경제개발구 투자유치국 국장
▲ 청도시청양구 투자유치국 고문
우중충한 건물들, 하늘이 낮다고 코를 잔뜩 쳐들고 우뚝 솟은 빌딩들은 그 아래 거리들에서 무언가를 찾아 분주히 오고 가는 사람들을 압박한다. 인간이 창조한 세계, 하지만 인간들에게는 너무나도 거대하게 안겨오는, 돈으로 빈틈없이 포장되어 눈에 보이는 도시는 그 속에서 자기의 삶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을 해면이 물을 빨아 들이듯이 흡수했다가는 또 바람의 신이 바람주머니를 풀면 바람이 쏟아져 나오듯이 뿜어낸다. 그렇게 흡수되고 뿜게 나오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나름대로 자기의 삶을 찾고 요란한 세상, 자지러진 소음속에서 자기의 보금자리를 가꾸어 간다.
인간세상이라고 하지만 그 앞에서 인간은 너무나도 왜소한 것 같고, 하지만 또 그 왜소하면서도 거룩한 인간들에 의해 이 세상은 시도 때도 없이 변하면서 부드러워지기도 하고 거칠어지기도 하고 따사로워지기도 하고 차가와 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세상이 따사롭든 차든, 거칠든 부드럽든 자기의 삶을 생명으로 영위해나가면서 인간생명의 가치를 찾아 사람들은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그 지혜와 부지런한 노동, 끈질긴 탐구와 적극적인 적응으로 자기의 지혜와 힘과 손길이 닿는 대로 세상을 다듬어 간다.
그래서 세상은 아름답고 어렵고 처절한 나날들이 있었을 지라도 그것을 아름다운 꽃다발로 엮어가는 것이다.
“두석달 동안 이창구와 사방구, 청도의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집다싶이 하면서 헤맸습니다. 겨우 7천원 밖에 안 되는 나의 ‘모든 재산’을 들고 다녔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택 부족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구두바닥이 다 다슬어 구멍이 뚫렸습니다. 쓰고 나니 3천원밖에 남지 않아 이제 더 돈구멍이 생기지 않으면 한집 세 식솔이 당장 굶을 판이었습니다.”
2000년, 이용군은 희망의 땅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한 청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자기의 삶을 영위해나가고 보다 나은 질의 삶을 창조하기 위해 그는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수리국 어정과(漁政科, 수리국에서 어로와 양어 등을 주관하는 부서)과장이라는 좋은 직업을 단연 떨쳐 버리고 남행의 열차에 몸을 싣고 떠나와 여기저기 희망이 보이는 청도를 찾았다.
왕청현 수리국에서 자기가 맡은 직책에 충실하면서 부지런히 일했지만 남방으로 떠나면서 온 집안에 현금이라는 현금을 모두 톡톡 털었는데 그것이 고작 7천원밖에 되지 않았다. 남들의 눈에 어쩌면 그것은 너무나도 적은 액수의 돈이었지만 그에게 7천원은 생명의 돈이었고 내일 창조의 바탕이었으며 온 가정 세 식솔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밑천이였다.
청도에는 한국 기업들이 수도 없이 들어와 있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모든 사람 어느 누구에게나 다 희망을 주는 것은 아니며 일자리나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코 어느 누구에게나 다 적합한 것은 아니다.
일자리는 많았다. 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이 하는 음식점이 거리마다 다정하게 앉아 있었고 한국으로부터 공예품회사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왔고 복장회사들이 날마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얼굴로 일거리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의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용군은 그런 것은 모두가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공예품회사나 복장회사에 들어가거나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 경리 노릇이나 하면서 월급을 받으려면 아예 남들이 우러르는 수리국 어정과 과장이라는 자리를 버리지 않았을 것이며 초조하고 힘들게 청도까지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오기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적합하고, 또 자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사업을 독자적으로 시작하는 것이 목표였다. 배우고 창조하고 개척하면서 가정과 자신에게 가장 큰 행복을 가져 다 줄 수 있는 흰구름이 두둥실 떠가는 푸른 하늘을 열어주는 것이, 그리고 거기서 자기의 힘으로 마음껏 나래 칠 수 있는 세상을 열어가는 것이 그가 하려는 일이였다.
그는 일자리를 찾기에 급급하지 않고 청도 바닥을 돌아다녔다. 자기에게 적합하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비록 아직은 확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찾아 헤맸다. 한국회사가 있다는 곳과 거리를 샅샅이 뒤졌고 혹 마음에 드는 일거리가 있을까 하여 찾았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남들이 다 한 다음에 보면 그런 것들이 그처럼 쉽게 찾아지고 성공에로 이른 것 같지만 실상 찾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두 달간을 이촌은 말할 것도 없고 사방구, 청양구, 노산구를 샅샅이 뒤졌다. 두 달을 헤매고 나니 구두바닥이 구멍이 펑 뚫렸다. 하지만 찾으려는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보다도 더한 것은 돈이 자꾸만 줄어 들어 이제 3천원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한집 세 식솔의 숙식과 일상지출, 이제 더 돈벌이 구멍수가 나지 않으면 굶을 판이었다.
현실은 잔혹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면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부터 하게 되는 것이다. 일단 출근을 하면서 기회를 찾으리라고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마침 다른 사람의 소개로 핸드케리 회사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한달 봉급 700원, 첫 해는 매 3개월마다 백원, 두 번째 해는 매 3개월에 2백원, 세 번째 해에는 매 3개월에 3백원씩 올려주기로 하자는 사장의 제의에 흔쾌히 동의하고 출근을 했다.
힘이 들었다. 하루에 70여 개의 박스를 컨테이너에서 싣고 부리다 나면 오후 3시까지 점심을 먹을 새도 없이 돌아쳐야 했고, 그러고 나면 온 몸이 무너지는 듯 했다. 때로는 짐을 싣다 나면 잘 못 실어 다 부리고 다시 차곡차곡 실어야 했다. 그럴 때는 물론 노동량이 2배, 3배로 되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듯 했고 어깨가 떨어져 나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를 악물었다.
그렇게 9개월 쯤 했는데, 일부 중국 업체들에서 한국에 수출하는 해물에 납덩이를 넣는 등 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한국세관에서 검사를 세세히 하게 되면서 뜻밖으로 핸드케리회사에서는 물건의 납기를 어기게 되어 사장은 하는 수 없이 회사를 해산시켰다. 회사를 해산시키면서 부지런히 일하고 무슨 일이나 남다르게 호기심을 가지고 적극적이고 확실하게 하려는 이용군을 자기와 가까운 친구 회사에 소개해주었다.
“핸드케리회사에서 일한 기간은 오라지 않았지만 거기에 출근하여 몸을 담고 일을 하는 기간, 사장님은 저에게 자본주의적인 관리방식과 시간관념을 철저히 가르쳤고, 저 또한 과거 기관에 있으면서 익숙해졌던 나태하고 소극적인 사유방식을 철저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써도 써도 다 쓰지 못하는 삶의 방법을 배운거지요.”
국내물류업체들과 유통업체들이 수풀마냥 솟아있고 막강한 실력을 갖춘 한국, 일본 등 자본주의 운영방식을 철저히 갖춘 물류업체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청도에서 막강한 파워의 순발력과 빛처럼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빠른 속도, 그리고 철저한 서비스로 그런 대 기업들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자기의 시장을 개척하는 핸드케리회사에서 수개월간 몸을 담고 일을 하면서 이용군은 기회는 누구 앞에나 공정히 나서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만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고 하더라도 마음이 닿지 않고 보아내지 못하고, 또 보아냈다고 하더라도 순발력있고 자기에게 가장 적당한 방식으로 집행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잡을 수도 없고, 또 그 기회를 활용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구정, 즉 음력설은 희망과 기회의 명절이다. 음력설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관계없이 모두 별반 차이 없이 크게 지내는 명절이요, 사람들은 구정을 계기로 새로운 기회를 포착하게 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게 되며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음력설, 중국에서 앞뒤 근 10일이 되는 명절연휴가 끝나고 정월 대보름까지 지나고 나면 기업들이 움직이게 되고 노동자들이 움직이게 된다. 이미 생산에 들어갔던 기업의 노동자들은 명절연휴가 끝나면 자기의 계획에 따라 적지 않게 움직이게 되고 또 새로운 기업들은 지난해 고찰과 계획에 따라 새로운 확장과 투자를 실시하게 되고 새로이 투자되는 기업들은 정초부터 투자와 생산을 가동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바로 기회였다.
핸드케리회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대기업들이 크게 움직이는 틈새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기에 따라 움직이는 사이 사이 한가한 컨테이너와 일정한 물량으로 자리가 비게 되는 화물선의 선적위치를 세 맡아 급하게 운송되어야 하는 화물과 적은 물량으로 운송에 어려움을 겪는 회사나 개인들에게 믿음직하고 확실하고 철저하고 요구를 만족시켜줄 수 있는 서비스를 해 줌으로 자기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핸드케리회사는 바로 한가한 시설과 어려운 화물주들 사이를 이어 주는 뉴대, 바로 그 틈새에서 자기의 시장을 찾는 것이다.
핸드케리회사에서 남다르게 열심히 일하며 배웠던 이용군은 바로 음력설 기간, 직원와 기업들의 큰 움직임이라는 이 기회에서 자아 창업의 파워포인트를 찾았던 것이다.
2001년 음력설이 다가올 무렵, 핸드케리회사 김사장님의 소개로 회사에 들어가 관리직으로 한 달에 몇 천원씩 받으면서 편안히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용군은 하지만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용군은 도약할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물밀듯이 쓸어 들어오는 한국투자기업, 공예품공장이나 복장공장에서는 많은 노동자들을 수요하나 어디 가서 어떻게 모집을 해야 할 지, 그리고 또 어떻게 하면 그 많은 직원들을 모집할 수 있는 지를 몰라 노동자모집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반면, 하택이나 연운항 지역들에서 생산력의 발전과 개혁개방이 심화됨에 따라 남아도는 노동력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현지 정부들에서도 그런 노동력 송출의 길을 열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
시장은 바로 여기!
이용군은 자아도약의 발판이 바로 노동력중개라고 직감했다. 그리고 실시에 들어갔다. 원래 핸드케리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배우고 철저한 관리로 신용을 쌓아왔던 관계로 전에 파트너 관계로 있던 회사들에서 이용군을 관리직으로 남겨두려고 했지만 그는 자기의 계획을 철저한 실시에 옮겨가기 시작했다.
현지 정부의 관계부서를 찾아 투자업체들을 요해하고 하택, 연운항 등지 정부를 찾아 노동력자원을 확보했다. 그리고 한국회사들의 수요와 노동자들의 기능과 요구에 맞추어 직업을 알선해주고 회사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생각대로 엄청난 효과가 나왔다. 이해 4000명을 소개했다. 노동력을 송출하는 현지 정부관계부문에서 중개비를 주었고 한국회사들에서 역시 수수료를 지불했다.
수차의 접촉과 합작관계로 노동력 송출량이 많은 현지 정부들에서는 분분히 이용군 사장을 특별고문으로 초빙을 했고 한국회사들에서는 신용도와 서비스가 철저한 이용군 사장을 찾았다.
“인력중개에 힘을 쓰다 나니 현지 정부와 한국업체들과 많이 접촉하게 되는데 신용이 쌓이니 차츰 저도 모르게 투자유치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간다고 무작정 추천해달라고 했고 또 개인이익보다 투자업체의 수요에 따라 철저한 조사와 서비스로 성공확률이 높으니 현지 정부들에서 찾아와 투자유치국의 특별직원으로 초빙했습니다.”
2003년, 우연한 기회는 이용군 사장은 사업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인력중개로 이용군 사장은 자연 한국업체들과 접촉이 많게 되었고 그 접촉과정에 돈보다는 신용과 서비스를 앞세웠던 관계로 한국투자업체들에서는 큰일 작은 일 가리지 않고 그를 많이 찾게 되었고 무슨 일이든 관계 없이 그를 찾아 중개를 해 줄 것을 부탁했고 많은 일들을 의뢰해왔다.
수년간 일을 해 오면서 이용군 사장은 인력중개 역시 중개회사로서 서비스 쌍방에 편리와 만족을 주어야 함으로 어려운 일 역시 직업정신과 그에 따른 확실한 서비스가 있어야 함을 심심히 느꼈다.
1990년대 말, 당시 왕청현 수리국 어정과 과장으로 있으면서 정부부서와 농민들의 관계에서 서비스의 막강한 힘을 느꼈던 경력은 이용군 사장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또 그가 사업을 펼쳐가는 길에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재부로 되었다.
그때 수리국 어정과와 농민들은 대치( 峙)상태에 처해 있었다. 수리국에서는 어로와 양어자원에 대한 보호와 관리, 그리고 그에 따른 재정수입이 있어야 했고, 농민들은 어로와 양어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일부 정책상의 문제와 농민들의 정부 관계부서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모든 사업은 힘이 들었으며 추진이 어려웠다.
일년에 어로작업을 하는 농민들로부터 200원~300원의 관리비를 받으며 관리비를 상납하지 않을 경우 어로도구들을 몰수하거나 과징금을 받았다. 그만큼 농민들은 불만이 많았고 관계부문에 협조를 거절하고 반발이 심해 때로는 관리일군들과 농민들 사이 폭력충돌이 발생하는 일들이 일년에도 얼마나 되는 지 헤아릴 수 없었다.
정책 입행이 되지 않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정책을 집행하지 못하거나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책 자체에 문제가 있어 집행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것이다.
이용군 사장은 어로과 과장을 맡은 즉시로 정부 주관부문과 협상하여 관계 규정을 수정했다. 일년에 그때 돈으로 200원~300원 관리비를 받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액수였다. 일년간 어로작업을 해서 그 정도 벌지 말지 한데 그만큼 받으면 결국 농민들은 일년 내내 헛일을 하게 되며 어로도구나 시설이 고장이 날 경우 외려 믿지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일년 관리비를 50원 좌우로 낮추었다.
관리비를 낮춘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입장을 전환시킨 것이다. 말하자면 어로과라는 이 관리부문의 관리방식을 확 바꾼 것이다. 즉 “관리”에서 “서비스”로 전환한 것이다.
전에 어로를 시작하면 돌아다니면서 관리비를 받던 데로부터 연초에 어로전문호들을 찾아다니며 협상을 해 관리비를 징수했고 정책을 통보하고 세세한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리고 어로도구의 구입과 보수, 어로구역의 확정, 등 일을 시작하기 사전에 모든 준비를 시켰고 농민들 보다 한걸음 앞서 나가면서 필요한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일은 순순히 풀리기 시작했고 더는 어로전문호와 관리일꾼들 사이 충돌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
창업의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용군 사장은 우선 확실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2003년, 600만 달러 투자규모의 한국업체에서 투자지 선택을 의뢰해왔다. 이용군 사장은 사전 투자 가능한 곳을 찾아 다니면서 현지 정부의 투자유치정책과 교통, 전력, 건물 등 자원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확실한 요해를 한 다음 한국투자업체에 가장 적합한 곳을 추천했다.
첫번째 기업의 투자가 성공되고 회사가동이 원만해지면서 부속기업들의 투자가 따라 들어오게 되었고, 이용군 사장이 유치하는 투자액수가 늘어나는 것을 본 현지 정부에서는 그를 투자유치특별관원으로 초청을 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군 사장은 인력중개에서 투자유치로 사업중점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때로부터 투자유치가 끊어지지 않았다.
한국투자업체와 중국현지정부에서 이용군 사장에 대한 신임도가 날따라 쌓이게 되고 따라서 투자유치를 주문하거나 투자지 추천을 의뢰해오는 회사들이 늘어났다.
수년간, 이용군 사장이 유치한 외자투자기업은 백 여개에 달하며 투자액수도 20억 달러를 치닫는다.
희망의 도시 청도, 파도가 일렁이는 청도 해변에서 창업의 기회는 언제나 수 많은 사람들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기회는 언제나 마음으로 볼 줄 알고 서비스는 나이가 없다는 진리를 숙지한 사람에게만 창업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 김명숙, 홍군식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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