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의 마음을 훔친 삶의 미용사
날짜 : 2007년 12월 24일 (09시 07분)
박호산 프로필
▲ 1970년 길림성 용정시 출생
▲ 1992년 秦皇島民革中山大學
영문과 졸업
▲ 현재 아랑스인테리어장식유한회사 사장
회사에 입사하면 열심히 일을 하라. 어떤 원인으로 열심히 일을 해도 회사에서 견뎌내기 어려우면 사장이 되라. 인생은 어느 시각에서 보았을 때 자아발굴을 하고 자기를 리드해나가는 스스로의 사장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머리말을 대신해서
우중충한 건물들,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도시의 모습과 그런 모습가운데 새롭게 일떠서는 아파트 단지들과 빌딩들, 그 속에 붐비는 기업인들과 창업자들, 많을 때는 하루에도 수십개의 한국기업들이 몰려드는 청도는 조선족들로 놓고 말하면 창업의 활무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집이 아니라 삶을 계획하고, 방이 아니라 쓰임새를 계획하고, 창문이 아니라 전망을 계획하고, 색채가 아니라 분위기를 계획하며, 조명이 아니라 빛을 계획하고, 장식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계획하는 작업이 바로 인테리어 디자인이라는 생각으로 삶이 아름다워지는 공간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즉 손님을 왕(王)으로 모신다는 뜻이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곧바로 훔친다는 삶의 미용사가 있다.
날뛰는 청춘의 영혼들은 청도라는 이 낯설고 익숙한 땅에서 자아를 디자인해가고 자아를 인테리어하기도 한다. 그 속에서 열심히 뛰는 사람, 자기의 길을 열어가는 사람, 청도아랑스 인테리어장식유한회사 박호산 사장을 찾아본다.
직원이 되지 못하면 사장이 되라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길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박호산 사장의 창업일기에서
쓸쓸했다.
비록 꼭 일자리를 찾으러 청도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창업의 터전으로 불리는 청도, 청도에 나왔던 김에 박호산 사장은 자아확인도 해볼 겸, 청도의 한인기업이나 청도에 진출한 조선족기업인들의 기업을 경험해보기도 할 겸 취직을 시도해보았다.
바로 5년 전인 2002년 4월, 박호산 사장은 청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취직이나 창업을 위해서 꼭 청도로 간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전설로 안겨오는 청도를 실감하고 청도를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물론 기회가 되면 청도에 정착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청도에 나온 김에, 박호산 사장은 한번 자아확인도 해보고 청도의 한인이나 조선족기업을 경험해 볼 타산으로 취직을 시도했다.
그러나 너무 실망이었다. 실망뿐이 아니라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연변사람이라는 말을 듣거나 신분증을 보면 면접할 때마다 인사주관이나 사장들은 모두 "미안합니다”하는 말을 앞세웠다. 한결같이 미안하지만 연변사람은 받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어쩌다 하늘이 보살펴 주었든지 다행히도 어느 한 한국 액세서리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원래 전공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던 박호산 사장은 입사해서 현장관리에서 전기관리에 이르기까지 다 해가며 아침 7시부터 밤 12시 까지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어쩐지 회사에서는 인정해주려고 하지 않았고 더구나 현장사장은 상욕까지 했다. 부모님들한테서도 상욕같은 것은 먹은 적이 없으며 청도에 나오기 전에는 더구나 개인 기업을 운영한 경험이 있었던 박호산 사장은 현장사장이 세 번째 상욕을 하는 것을 듣고 더는 참을 수 없어 회사를 뿌리치고 나왔다.
용정에서 출생하여 고중을 마치고 진황도 민혁중산대학 외국어학부에 입학하여 영어를 배웠고 대학 졸업 뒤에는 다시 연변으로 돌아가 창업의 길에 들어섰다. 그 사이 그는 구두닦이에서 삼륜차, 그렇게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차츰 자금을 모아 광고회사를 운영하기에 까지 이른다. 일이야 크든 작든 그가 걸은 길은 스스로 사장이 되는 길이었다.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는 사장으로 성장하는 길을 걸었던 것이다.
액세서리회사에서 퇴사한 박호산 사장은 다시 청도아혁인테리어에 취직을 했다. 대학졸업증을 가지고 있는 박호산 사장을 아혁인테리어에서는 인차 관리직에 배치했다. 하지만 박호산 사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현장관리와 업무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자기의 사정을 잘 아는 박호산 사장은 일단 2개월간 현장에 있으면서 업무를 배우고 회사사정에 익숙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업무를 익혔다.
1년간 아혁에서 업무를 익힌 박호산 사장은 얼마 후 퇴사를 하고 자기의 회사를 차렸다.
드디어 스스로 사장이 되었던 것이다.
프로젝트를 찾지 못하면
가장 익숙한 일을 하라
자기가 가장 익숙히 아는 업종에 종사하는 것이 바로 성공에로 가장 빨리 다다를 수 있는 지름길이다.
-박호산 사장의 창업일기에서
회사에 다니면서 박호산 사장은 아직 적당한 일거리를 잡지 못한 아내에게 옷가게를 하나 차려 주었다.
원래 연변에서 창업을 하면서 광고회사를 운영하여 적지 않은 돈을 벌기는 했지만 어머님이 백혈병으로 돌아가면서 그는 손에 있던 돈을 빡빡 긁어 써 청도에 진출할 때는 빈털털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구두닦이에서 연길에서 잘 나갔던 광고회사까지 운영했던 박호산 사장은 현실에 굴복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자기가 회사에서 받은 돈을 한푼두푼 모아 매장을 임대하여 아내에게 옷가게를 하나 차려주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그는 아직은 개발이 되지는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으면 금방 번화가로 될 듯한 거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직 사람들이 눈길을 돌리지 않을 때 선점을 한다면 저렴한 가격으로 집을 세 맡고 매장도 증식효과를 가져올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경제실력이 어렵고 규모가 작은 상황을 고려하여 동업종의 친구들을 찾았다. 그리고 자기의 의사를 말했다. 생각밖으로 복장매장을 하는 친구들은 적극적으로 호응을 해나섰다.
하여 얼마 후 옷가게를 하는 친구 8명이 함께 그 거리로 진출을 했다. 아닌게 아니라 예상대로 매장 값은 헐값이었다. 한명이 움직이면 고객들이나 관광객들이 눈길도 돌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8명이 함께 움직이니 완전히 다른 결과가 나왔다. 바로 8명이 함께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시너지 효과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고객들이 찾아들기 시작했고 창업을 원하는 사람들은 8개의 점포가 오픈을 하는 것을 보고 금방 될거라 인정했든지 너도나도 입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가게의 가격도 따라서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리는 1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숱한 가게들이 들어서게 되었고 금방 번화가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박호산 사장이 점포를 잡을 때만해도 1만위안 정도밖에 하지 않던 점포들이 2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6만위안 이상으로 껑충 뛰어 올랐다.
이렇게 부지런히 뛰면서 일정한 자금을 쥐게 된 박호산 사장은 자기의 회사를 차리리라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하지만 합당한 프로젝트가 나서지 않았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박호산 사장은 궁리하든 끝에 경쟁이 치열하고 시장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렵기는 하지만 자기가 가장 익숙한 인테리어 시장에 뛰어들기로 했다. 할일을 찾기 어려울 때는 가장 익숙한 일부터 시작하라는 옛사람들의 말씀은 틀린데가 없었다.
전에 광고회사를 운영하면서 인테리어에 치중했고 또 액세서리 회사 취직경험과 인테리어회사 취직경험을 가지고 있는 박호산 사장은 결국 자기가 가장 익숙한 인테리어업종에 뛰어 들었다. 자기가 가장 익숙히 알고 있는 업종에 뛰어들었기에 신심이 생겼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일을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돈이 벌어지지 않으면 인심을 벌어라
돈을 벌려고 회사를 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이 사람이다. 하지만 돈을 벌자고 해서만 돈이 벌려지는 것이 아니라 돈이 벌어질 수 있는 인격을 갖출 때 돈은 자연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박호산 사장의 창업일기에서
물론 돈을 벌자고 회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돈은 벌자고 한다고 해서 다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돈을 벌자고 해서 돈이 벌어진다면 가난한 사람은 없을 것이고 부도가 나는 회사는 없을 것이고 운영에 어려움이 닥치는 회사는 없을 것이다.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나 돈을 벌기를 싫어하는 회사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은 벌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다 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왜? 경영이념과 경영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랑스인테리어를 이끌어나가면서 박호산 사장은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비록 후에는 평도의 서문전자, 해양의 진흥전자, 유방에 LTC, 청도의 LG전자 등 큰 회사들의 인테리어를 맡아 하기에까지 이르렀지만 초창기는 갖은 어려움을 다 겪었다. 그 어려움 가운데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늘에까지 성장할 수 있은 것은 바로 인심을 얻는데 회사의 기반이 튼튼히 다져져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회사는 인간성과 인격이라는 탄탄한 기초 위에 기틀을 잡았기에 건강하게 성장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느 한번의 오더를 딴 경험은 박호산 사장에게서 잊을 수 없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고 차후 그가 사업을 펼쳐 나가는 데 항상 자신을 격려하고 사안으로 되었다. 바로 진심으로, 고객이나 바이어를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한다는 박호산 사장의 경영이념이다.
한번은 한 한국회사의 인테리어를 하게 되었는데 이 오더 하나를 가지고 4개의 인테리어회사에서 견적을 뽑았다. 한 회사에는 8만위안, 다른 한 회사에서는 6만위안, 또 다른 회사에서는 4만위안, 하지만 박호산 사장의 견적은 불과 2만 7천위안이었다.
한국인들의 인테리어에 대한 요구는 까다롭기로 소문이 나있다. 하지만 박호산 사장의 견적서를 보고 한국인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전에 다른 회사들의 인테리어 모델하우스를 하나하나 다 점검했던 그 한국상인은 박호산 사장의 모델하우스와 견적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가격을 많이 깎는 성격이었지만 기상천외로 외려 바이어쪽에서 그에게 이런 가격으로 돈을 벌수 있느냐 물어왔다. 박호산 사장은 미소로 대답했다. "회사에서 돈을 벌지 못하면 일을 할 수 없지요."
결국 그번 오더를 따낸 박호산 사장은 자기의 새로운 길을 열게 되었다.
가격이 싸고 모델하우스의 인테리어가 마음이 들었던 그 사장은 시험삼아 박호산 사장에게 일을 맡겼다. 결국 만족이었다.
그 한건의 오더로 박호산 사장과 N X상사 사장은 형님 아우하는 가까운 사이로 되었고 N X상사 사장은 박호산 사장이 부탁할 새도 없이 자기의 인맥을 이용하여 그에게 오더를 받아 주었다.
일부 한국상인들이 중국조선족회사라는 말에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하면 N X상사의 사장은 자기의 회사까지 데리고 가서 보여주면서 적극 추천해 주었다. 합작파트너나 바이어에 대한 배려가 결국 자기에 대한 배려로 된 것이다.
지금도 박호산 사장은 A/S가 생기면 몸소 나서는 경우가 많다. 밥상에서 주방 도어에 이르기까지 A/S를 부르면 총알같이 달아가 해준다. 그리고 박호산 사장은 A/S에서 그 기한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한번은 어느 음식점에서 인테리어가 끝난 지 2년도 넘었는데 A/S를 불렀다. 그 길로 가보니 상에 뜨거운 물건을 놓아 상 면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물론 사용상 부주의나 사용 부당으로 발생된 문제로 인테리어회사와는 관계가 없었고, 또 요금도 물론 상대방에서 내야 할 형편이었다. 하지만 박호산 사장은 말 한마디 없이 새것으로 바꾸어 주었다. 그리고 식사대접도 마다했다. 자기들이 할 일이라고 했다.
보기에 밑지는 장사를 하는 것 같았지만 남에게 돌려준 배려는 결국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합작파트너 회사들에 대한 배려와 내가 밑지고 들어간다는 이런 순박한 마음가짐으로 일을 해 주기에 지금 비록 인테리어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하고 가격이 너무 투명해 이익공간이 아주 작다고 하지만 박호산 사장이 이끄는 아랑스인테리어는 07년 같은 불황기에도 300만원이라는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든 역경을 스승으로 모셔라
역경을 어려워 말아라. 우리의 선인들은 역경이 사람을 키운다고 했다. 역경에서 자라난 사람만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다.
-박호산 사장의 창업일기에서
박호산 사장은 청도에 진출하기 전, 연길에서 창업을 할 때부터 역경은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다.
대학을 졸업하고 창업의 시도했으나 창업이란 순풍에 돛을 단 격이 절대로 아니요, 창업이란 어려움과 역경으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남들은 아직 모두 체면에 아무 일에나 선뜻이 손을 대지 못할 때 박호산 사장은 "돈을 버는 데 무슨 체면이 필요한가, 돈을 버는 게 바로 체면이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손에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구두닦이에서 인력거끌기, 삼륜차에 이르기까지 돈이 벌려지는 일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는 하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했다. 구두닦이, 삼륜차, 그리고 청도에 진출해서는 꼬치구점에서 보이까지 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이상한 눈길을 밥먹듯이 받았고, 치욕과 수치를 참아가면서 속으로는 자기의 길을 개척하리란 결심을 품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고 항상 바른 마음가짐으로 자기의 창업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기에 힘을 다했다.
“그때 나를 욕해준 분들이 바로 가르쳐주신 분들이지요."
박호산 사장은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아혁인테리어에 있을 때 금방 입사한 박호산 사장은 욕을 많이도 먹었다. 때로는 아침에 시작된 교육이 오후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그런 욕을 먹고 교육을 받은 것이 지금은 더 없이 소중하고 도움이 되는 재산이라는 것이 박호산 사장의 생각이다.
그래서 지금도 박호산 사장은 고객이나 바이어들의 불평과 불만, 그리고 지어 인격을 손상하는 말까지도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만큼 그런 것들을 자기의 경영과 사업에 유익한 양분으로 소화시킬 수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경쟁이 치열한 청도의 인테리어 시장에서 자기의 자리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박호산 사장이 이끄는 아랑스인테리어는 이런 마음가짐과 자세에 힘을 입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합작파트너와 고객을 사랑할 수 없고 그들의 불평불만을 소화시키지 못할 이유가 어데 있겠어요. 문제는 그런 것들을 얼마만큼 자기에게 유익한 양분으로 섭취하느냐 하는데 있지요."
이제 2007년을 마무리하면서 박호산 사장은 새해의 구상을 무르익히고 있다. 이미 받은 기업체들의 인테리어 오더들을 잘 정리하고 디자인하면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 김명숙 홍군식 특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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