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민들레컵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부끄럽지 않은 삶의 이야기와 존엄한 생명들

김영수

 


  머리말

  무상이란 말을 실감할만큼 올한해는  바쁘게 마감된다. 달려야 하는 한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후기 산업주의사회가 날로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과연 얼만큼 행복하고 보람찬 삶을 살아왔는가고  묻고 싶었다

  개인의 이익과 영달을 위한 것이 결코  인간의 행복과 보람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고 볼때 이는 타인에 대한 시선의 온도와 공감력의 차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이웃들은 행복한가? 안녕한가? 진지하게 질문하고 정직하게 대답한다면 결코 대답을 서뿔리  수가 없다.
   ‘눈부신물질주의가 이룩한 생활수준의 향상은 긍정적이되 다른 한편 물질 지상주의가 초래한 정신적 삶의 이소외와 피폐를, 그리고 비정한 산업주의사회가 빚어낸 환경재난과 도덕적 불감증은 이미 우리의 마음과 이웃들 사이의 관계를 날카롭게 했고 각자의 외로움과 단절을 가져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생각하는존재로서의 인간이기에, 아핑검스쿨의 교훈처럼 역사를 만들어가는 보통사람들 좋은 시인과 아버지와 어머니 있기에 우리는 새로운 극복의 역사적 장들을 계속해서 마련하는 것이다. ‘한사람이 슬프고 우울한 표정으로 한쪽에 서있으면 그의 손을 잡아 원안으로 끌어들이는 하시디즘(유대교신비주의) 종교의식처럼 시인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처한 절박한 시대,  통합의식에 가장 알맞은 주례의  부류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통찰과따뜻함으로가슴의 문학 해왔다는 평가를 받는 나오미쉬하브나이(1952-) 이렇게 적고 있다
   목소리가 들리나요?  글을 담은 작은 배가 당신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렇다. 새해 벽두가 다가오는 싯점에 행복 보람이란 낯말을 다시 성찰하게   그것은 결코 자신이 아닌 타인에 대한 부드러운 시선과 공감이 가져오는 작고 눈부신 것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2019년도 연변문학한해의 전반 시작들을 읽어보았다. 많은 훌륭한 시작들 가운데서도 필자는 따뜻한 공감과 소통이야말로 시의 본령이라는 나름대로의 시각을 세우고 우리의 영혼에 깊은 울림과 감동을 선사하면서 또한 보편적인 삶의 의미나 생명가치의 체현에  정성을 기울인 시작들에 시평을 달게 되는 행운을 지니게 되었다.

 

  1. 영원한 모성, 부끄럽지 않은 삶들의 이야기

  신은 모든 것에 있을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 말은 결코 틀리지 않다. 모성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였으나 사실 느낄  조차 없을 정도로 침묵으로 일관된 아버지의  같은 사랑이 조용히 숨쉬고 있기에 부성에 관한 말은 오히려 적은 편이다. 하지만 모두가 모성으로 귀결될  있는 동등한 사랑으로 모성이라  때는  뒤에 뒷받침되어 있는 아버지의 거대한 사랑이 반드시  한몫을 차지하겠다. 이처럼 모성 대한 주제 역시 끊임없이 시인들의 시창작에서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며 노래되고 있었다. 나무 뿌리와 같은 모성에 안주할 때만이 삶의 열매와 꽃을 풍성하게 맺을  있는  절대의 원리를 시인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파란 우산, 파란 양산/ 높이 들어 펼치고/   숨어 자란 호박이// 수줍음을 벗어던지고/ 대지를 구르며/ 나의 등에 올라 업히였다// 넝쿨채로 호박이/ 해를 안고 달을 안고/ 뒹굴뒹굴굴러온다// ……속을 비워/ 빈껍데기로 남을 호박이/ 잔등을 모없이 다지며/ 아버지 같이 엄마 같이/ 나에게 업혀 고스란하다// 호박씨  이발이 몰고 있는/  꿈이 총총총 심어진다/ 다정해진 가슴에// ……

  박장길 2019 5월호 <호박씨 흰이발>

 

  순진무구한 동화적인 상상력과 건강한 생활의 낭만 유머, 그리고 부모에 대한 사랑의 정감이 빚어낸 호박의 이미지가 따뜻한 희열을 선사한다. 산뜻한 비유법과 유머스러운 의인화 수법  뒹굴뒹굴’、 총총총  둥글둥글 등의 태어법은  시의 상술한 총기 더해주었다면 이러한 순수한 동화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활  가장 깊은 관계의 사랑을 함축적으로 다룬  시는 실로 아름다운 감동을 주고 있다.  ‘빈껍데기로 남을 호박이  잔등을 모없이 다지며 ’‘아버지 같이 어머니 같이’‘ 나에게 고스란히 업히는 장면은 우리의 가슴 깊이 영원히 남아야  원형 장면으로서 우리 모두에게 행복의 원천을 제공하는 뭉클한 역사의  장면으로도 각인된다. ‘흰이발 가득 웃음을 짓는 호박의 모습에 이미 행복이 충만되고 힐링이 되는 순간이다.  

 

  해달의 총애와/ 이슬과 바람의 배려/ 그리고 천지의 포근한/ 사랑만을 쪼아 먹고/ 파랗게 행복하던/ 배추는 철이 들어서야/ 사근사근 맛갈스런/ 김치가 되었다/…코가 베어지는 아픔과/ 등을 굽히는 인내 그리고/ 오만했던 자신을 반성하는 고독을 배우는 시간이었다/…여린 속살에 스미는/ 아린 마늘과 매운 고추로/ 반죽된 양념들이 마음대로/ 온몸을 샅샅이 뒤지며/ 아무렇게 난도질해도/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사근사근 맛갈스런 김치/ 더는 배추만은 아니다/ 배추는 오직 역사일뿐이다.

  최화길 2019 6월호 <김치>

 

  인간의 생존은 고통이 따르기에 보다 존엄하고 가치가 있다 말한다.  시는 배추가 김치가 되어가는 세부묘사를 통하여 인고의 통증 속에서만이 비로소 참다운 생명개체로 탄생되는 의식(仪式)과정을 보여준다. 서민의 일상음식인 배추김치로 고통이 얼룩진 풍진 세상에서도 인내하고 희생하며  터널을 지나는 인간 삶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은 우리에게 안위를 준다. 어떻게 보면 여름날의 청배추 같은 파란 청춘을 기꺼이 희생하면서까지 가정과 자식들을 위해 삶의 고통에 난도질당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삶의 이야기인듯 다가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기꺼이 먹혀 다른 삶들을 살찌우는 배추 김치의 일생은 고통이 충만된 세상 속에서도 무엇이 존엄한 생명의 완성인지를 우리에게 던져주는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다.  

  무릎이 아파서 어쩌니/ 무릎이 아파서 어쩌겠니/   무릎의 시인이/ 드뎌 사막에까지 달려와/ 무릎을 꺾어 사막에/ 무릎의 문양을 탁본   새겨넣었다// 무릎 속에 모래들이 사각이는 소리/……아픈 무릎을 만져주던/ 엄마의 손이 사막에는 없단다// 아아, 엄마가 그리워/ 한방울 물로도 남지 못하고/ 불로승천한 엄마/  엄마의 부름소리가/ 사막의 밤이슬로 내려앉아/ 말라 부스러지려는 무릎에/ 성수처럼 뿌려지기를 바라며/ 기어서  사막에/ 무릎의긴 역사를 적어야 하리//  역사를 탁본  아이는/ 나더러 사막의 모래 한줌/ 선물로 가져다 달란다

  조광명 2019 9월호 <무릎의탁본>

 

  엄마라는 이름에는 원초적이고 절대적인 힘이 있음을 부인할  없다. 아놀드토인비가 어머니의  사랑만이 물질문명으로 병든 미국사회를 구원할  있다.’ 말하다시피 모든 개체의 성장과 건강한 삶의 확장에 시종일관 개입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바로 모성이다. 홀로 태어나 홀로 가는 인간의  대부분은 마치 거친 사막을 지나가  고달프다. 그러니 우리의 삶을 무릎이 아픈 삶이 켤코 아니라고 누가 감히 말할  있을까? 무거운 숙명의 짐들을 지고 삶의 사막들을 지나다보면 사람들은  고통에 괴로움을 호소하며 본능적으로 모성을 찾아 안주하려는 무의식적 행위를 보여주기도 한다

   시에서는 고난이 불가피한 공동체 운명들의 삶에 온몸으로 동조하려는 시인의 역사적 사명감을 모성과 함께 읽을  있다.

 

  물은 / 바람이 미끄러지면/ 세월에 거칠어진/  아버지의 주름 같은/ 파도를 수면에 일렁일까// 아버지는 / 세월이 스치면/ 바람에 흔들리는/ 강물의 파도 같은/ 주름을 얼굴에 파셨을까// 강물을 보면/  아버지 같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강물 같다//  이막아서면/ 뛰어서 넘으시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서슴없이 날아내리는// 산산이 박산났다가도/ 다시 일어나서/ 사품치며 달려야, 달려야 하는/  강물 같은 나의 아버지// 강물은 흘러흘러흘러서/ 바다에 가고/ 아버지는 고생고생고생 하다가/ 하늘에 가셨네.

  김춘산 2019 11월호 < 같은 아버지, 아버지 같은 >

 

  물과 파도, 그리고 아버지와 주름에 대한 어휘들을 상호 심투시켜 비유하고 대조시키면서동격을 이루게 하는 시어들의 구성으로 아버지란 이미지가 더욱더 확고하게 가슴에 와닿는다.  ‘뚝이 막으면 뛰어서 넘으시고 낭떠러지를 만나면 서슴없이 날아내리고,  ‘산산이 박산났다가 다시 일어서 사품치며 달려야 하는  땅의 아버지들의 운명을 가장 알맞게 묘사한 시구라고 본다. 그대로 우리의 가슴을 적셔주는 이러한 시적 정감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현실적으로 아버지란 의미에 대하여, 또한 그들의 영혼 깊이에 다가가 우리를 성찰하게 만들고 마음을 울리게 하는 기폭장치라고 생각한다. 아울러 아버지에 대한 문화적인 해석과 공감대를 계속 마련하도록 하는 촉매장치이기도 하다

  욕탕문에 밀리우며/ 여자가 들어온다/ 처마  우거지 같이/ 젖가슴이 걸려있는// 쇄골은 / 페쇄된 마른 우물/  같던 거웃은/ 검불로 흐트러져 있고// 누군가를 잉태시킨/ 궁궐인양 풍요로웠을 몸매가/ 낙엽이 되어/ 욕조 위를 떠돈다// 저렇게 낡은 여자를/ 에누리없이 색바랜마른 껍데기를/ 바닥처럼 가라앉은 지푸라기를// 눈으로 다가가/ 쓸어담듯 천천히/  몸안으로 담는다/  속에 / 나를 절인다.

  심명수 2019  1월호 <여자>

 

  언어로 그림을 그린 듯한  시는 핍진한 시각적 효과를 가져다준다. 담담한 시선과 절제된 일상적인 언어로 황혼기 여성에 대한 냉정하고 여과없는 형상묘사를 통하여 보편적인 여성상과 그들의 실존적 의미를 정직하게 이끌어낸 작품이다. 냉정하도록 리얼한 묘사 속에는 삶의 고난 속에서  가정을 위해 희생을 인내하며 살았던 여성들의 보이지 않던 과거사가 눈물겹도록 안겨온다. 그러한 희생 삶에도 불구하고  속에 나를 절이겠다 여성 화자의 담백한 자세가 오히려 신빈성을 주면서 더욱더 보는 이들을 숙연해지게 한다 

 

  누가  저쪽에서/ 힘껏 보자기를 당겼다 놓고/ 당겼다 놓는다// 출렁이는 강물/ 거대한 보자기로/ 나를 싸안고 간다// 강물과 한몸 되어 흐르며/ 무한한 자유를 유영한다//  깊고 깊은 아래에서 솟아나/  세계를 건너온/ 물의 품은 요람이다// 기러기 떨구는 울음 섞어/ 마음에 단청하고/ 나도  누구에게/ 푸른 보자기로/ 펼쳐지고 싶다.

  박장길 2019 5월호 <>

 

  강물의 원형은 광의적인 문화의미에서 생명존재의 모태, 풍요와 생명력의 원리가 된다면 우리민족의 경우 <용비어천가>에서 깊은 물은/가뭄에 아니 그칠 / 내가 되어 바다에 가나니라고 말하듯이 물은 문학적으로 자연스럽고 그러면서도 유연한 순리  맑은 지조와 약동적인 기운 등을 의미한다. 강물의 형태를 민족적인 유산의 상징인 보자기' 이미지로 표현한 시적발상은 기발하면서도 전통에 가치를  깊은 맛이 있다. 이런 전통의 맛은 민족적정감을 담은  기러기’、 단청  이미지에서도 우아하게 드러나고 있다. ‘모성이란 인류문화적가치와 포용과 순리를 지향한 역동성으로 가미된 민족의 문학적 이미지가 씨줄과 날쭐처럼 어울려 무한한 대동세계의 자유를 꿈꾸는 시적 화자의 배려 깊은 시각이 드러난다.

  이처럼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성에 안주하여 혹은 모성과 결부시켜 감미로운 서정과 사랑의 근원세계를 펼쳐주고 있었다면 아래의 시들은 공동체운명들의 결코 부끄럽지 않은 삶의 세계를 뭉클하게 인간적인 시선에 담아 표달하기도 하였다

 

  한해살이풀이 만든/ 엷은 껍질의 다육이/ 손가락마디만한 과일이// 처서가 되면/ 누가 생각나나 보다/ 속에 씨를 그득히 품고/ 그리움처럼 뭉클/ 안으로 파고 온다// 차라리 감귤처럼/ 어엿이 높게 달리면/ 고개 들어 바라기라고 하련만// 너는  밟아 사는/ 끌신키보다 조금 높게/ 계절을 머금었는가// 가을이 다왔는데/ 땅꼬마 같이 아릿하게.

  심명수 2019  1월호 <땅꽈리>

 

  아련하도록 온몸을 적셔주는 다정스러움이  시의 소박한 미를 자아낸다.  ‘감귤처럼 높게 달려 바라볼  있는 도고한 삶도 아닌 운명들이 씨를 그득히 품고 처서가 되면 누가 생각나 끌신 키만큼 땅을 밟고 서있는 장면은 서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수많은 삶의 현장과  속에서조차 익숙한  누구들의 애틋한 모습이고  우리가 짓는 실제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비록 땅꼬마지만 나름의 계절을 머금고 속에 씨를 한가득 품고 그리움을 띄우며 살기, 가을은 그래서 땅꽈리처럼 우리 곁에 달게 무르익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안산 바위고개/ 올라가는/ 길에는/ 낙엽이 깔려있다// 박달나무나/ 상수리나무가지에서/ 그네를 뛰다가/ 발밑에 내려 앉아/ 사각사각 소리를 낸다// 낙하를 한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만이 아니리라/ 홀로/ 가지끝을 잡고 있으면/ 외롭고 춥다/ 내려와 앉아서/ 서로 비비고 부딪치면/ 이불처럼 따뜻하리라// 퍼렇게 독이 오른/ 이파리들은/ 벌써 가을이 오고/ 겨울이 먼발치에 서있으면// 산아래/ 아스하벌에서/ 고개 숙이는 오곡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하나둘씩/ 낙하를 한다// 공주나 왕자 같던/ 그들이/ 엄마나 아빠처럼/ 푸근해진다// 마안산 바위고개/ 낙엽들은/ 철이 되면/ 빨갛게 수줍어한다

  김춘산 2019 3월호 <낙엽>

 

  화려한 수식을 찾아볼  없는 시다. 그럼에도 평이한 언어와 부드러운 어조  일련의 맞춤한 의인화수법과 비유 수법으로 독자의 시각을 자연스럽게 끌어당기면서 낙엽의 상징적의미에 대해 하나가 되는 아름다움으로 접근하게 한다. 그리하여 개체들의 연대감 참된 개체의 성숙이란 의미가 더욱더 명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가지 끝을 잡고 있으면 추워서 ’‘내려와 서로 비비고 부딪치는 인간적인 면모나 공주나 왕자 같던 그들이 고개 숙이는 오곡을 바라보다 ’‘엄마 아빠처럼 푸근해지는 겸손성과 원숙함의 자세가 철이 되면 빨갛게 수줍어하는 장면은 더욱더 감명을 자아낸다. 이처럼 이불처럼 따뜻한 낙엽의 모습들에서 올해도 지성과 감성의 바람직한 요소들을 갖춘 고귀한 삶의 예사롭지 않은 모습들이 낙엽 통해 드러나고 있다. 이런 고귀한 삶의 자세는 아래 시에서도 소박하게 표현되고 있다.

  아직은 반팔을 입은 두팔이 느끼는/ 아침바람이 약간 차다는 느낌 속에는// 무더위가 드디어 떠나갔다는 홀가분함과/ 다가올 추위가 아직은 멀다는 안도감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36.5/ 사람의 온기를 향한 그리움이 있다// 말랑말랑한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선선한 바람 속에서/ 가을과 아침과 아이와 사랑을/ 마음껏 살려낸다// 나한테 주어진 소중한 소중한 순간들/ 진흙처럼 보여질 수도 있는 평범함 속에/ 어여쁜 꽃처럼 생생한 빛을 발하군 한다// 사랑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에/ 이름을 지어본다/ 꽃을 향한 부름처럼

  유려 2019 12월호 <가을아침>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36.5도의 평범한 삶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우리 삶의 의미가 판결나는 소중한 철학적 숙고를 가져오게 한다. 어떻게 보면 따분하고 진흙처럼 보이는 삶이지만 가슴의 눈을 뜨고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 결코  순간의 삶과 생명이 평범하진 않다는 시인의 시각은 선자(禅者) 눈처럼 푸르르다. 나한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순간들을 어여쁜 꽃처럼 대하고  이름들을 불러보리라는 시인의 자세는 우리가 분명 가져할 생활의 품위일 것이다

  그러나 아래의 시는 이러한 건강한 품위를 잃고 폐쇄된 자세로 굳혀진 사람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다루기도 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열쇠수리공에겐/ 길가의 행인들도 자물쇠였다// 방범자물쇠의 개진으로/ 집문이 안전해지면서/ 사람들은/ 잠그는 것으로 안전감 만긱한다// 그래서 인정도 잠그고/ 자기도 잠그고/ 현실도 잠근다// 매번 자물쇠 열어갈 때마다/ 얼굴이 열려지는/ 열쇠수리공은/ 열어가는 것으로 안전감 만긱한다// 그래서 자물쇠도 열고/ 사람도 열고/ 인생도 열어간다// 쉽게 열리어 버려진/ 자물쇠는 있지만/   없는 자물쇠가 없는 세상// 복제용 열쇠가 줄줄이 걸려있는/ 작은 가게에서/ 열쇠수리공은 깨달았다/ 삶은 부단히 잠그고/ 끊임없이 열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열쇠수리공에겐 길가의 행인들도 열쇠였다

  박찬휘 2019 4월호 <열어가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한 삶의 단면을 통찰력있게 다루고 있다. 물론 인정도잠그고  ‘인생도 열어간다  필자가 보기에 불필요할  같은 일부 시구가 시의 함축성과 상징성에 다소 아쉬움을 가져오기는 하지만 관계가 단절되고 삭막해지는 군상(群像)들을 보며 자물쇠 잠그면 열쇠 계속해서   있는 상황구도로 전변시키면서 위기극복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는 점은 안도감을 준다. 또한 첫시행이 자물쇠  인지된 행인들이 마지막 시행에서 열쇠 인지된 상황 역시 이런 상직적구도를 보다 원활하게 이끌어주는 구실을 한다. 열쇠수리공만이 열쇠가 아닌 자물쇠이면서 열쇠   있다는 행인 이미지 설정은 소통과 이해가 부족한 시대에 던져주는 살아있는 화두로 지극히 합리적이고고 무적이다

  눈부신 문명을 공유하고 창조해가는 공동체운명이란  울타리 속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비록 각자 자물쇠이지만 동시에 자신과 서로를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해주는 각성(觉性) 시사해주고 있다

 

  2. 경이로운 생명의 희열과 레드빛 언어들

  통합이란 사명감과 조화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나가는 시인은  생명의 새로운 의미탄생에 대하여  정신력을 집중하게 돼있다. 시인이란 존재는 모름지기 진실한 삶의 현장에 대한 남다른 발견과 레드빛 언어들의 재해석을 통하여 생명에 대한 존경과  경이로움들을 예찬할  밖에 없다. 이로써 살아있는 모든 그대 대한 예의를 표함으로써 생명은 한결 존엄해지고 평화는 삶에 안주한다. 그렇다고 삶의 한마당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인정하고  갈등을 봉합하기 위해 시인은 가슴에 축복의 등불을 남몰래 밝혀 두고 언어의 행복한 집짓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겨울/ 님의 꽃잎 같은/ 하아얀 눈송이 위에/ 집을 짓습니다황금의 체념이 아닌/ 어머니/ 깨끗한 영혼의 해발로이아들은 삼가/ 어머님의 소망이/ 언어 속에 잠자는/ 집을 짓습니다나붓기어도 소리 없는/ 찬란한 웃음으로/ 천년 해란강, 야트막한 언덕 위에/ 눈물로 뿌리 드리운/ 가난한 청순의  집을/ 시인의 집이라고 불러봅니다통합을 비원하는 마음의기도 위에/ 어머니. 아들은 오늘도/ 오늘도 걸어갑니다.

  김학송 2019 5월호 <나의 >

 

  하얀 꽃잎 같이 순결하지만 금방 녹아 사라지는 눈송이는 순간에 불과하다. 그러나  위에 어머님의 소망 담아 집을 짓겠다는 시인의 행위에는 진정성이 가슴에 와닿는다. 주체와 객체의 통합을 자아와 세계와 이념의 통합을 반복해서 시도하기에 시인은  세상에 없어서는 안될 아름다운 평화주의자다. 눈송이에 언어의 집을 짓기에 가난이 드리운 집인줄 알면서도 어머니 경건한 이름으로 깨끗한 영혼의 해발로 언어의 집을 짓겠다는 시인의 행위는 진실하다. 비록 시인처럼 살지 못하지만 시적인 마음을 갖지 못한 것이 세상사람들의 갈등의  요인인  같다.

  

흐느적이는 풀잎따라/ 세월이 흐른다는 / 살다보면 알게 된다// 부드러운 바람결에/ 영혼이  핀다는 / 살다보면 알게 된다// 구름의 슬픔이 봄비가 되고/ 바람의 언어가 사랑이 된다 는걸/ 살다보면 알게 된다// 지상의 모든 물이/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까닭을/ 살다보면 알게 된다// 그리하여 마침내/ 강에 흐르는 것이 물이 아니라/ 우주의 눈물이라는  알게 된다.

  김학송 2019  5월호 <노래가 흐르는 >

 

  개미와 풀꽃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신의 존재도   없다 독일의 사상가 마이스터에크하르트는 말한다. 풀잎과 , 구름과 바람에서 세월의 이동과 영혼의 사랑과 슬픔을 느낄  아는 자는 시인임에 틀림없다. 굳이 시인이란 신분을 갖지 않아도 통합의 정서를 지향한 시적인 마음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광활한 우주의 숨결과 사랑을 감사하게 느끼는 일이 된다. 우주는 만물을 품어주지만 결코 자신을 드러내놓지 않는  살다보면 알게 되는’‘ 지상의 모든 물이 낮은 곳으로 흘러가 생명의 강과 바다가 되는 겸손한 지성을 지인은  우주적인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우주적인 시각은 여타의 시에서 특정 대상물에 대한 더욱더 섬세한 시각적 조명으로 드러나고 있다.

  패인 늪에서/ 얼음은 여직 푸른 독기 뿜는데/ 봄나무 뿌리는 아물아물 피는 향을/ 가지에개어올리고 있다// 영각이 동면 벗으며/ 빛으로 크는 시간// 껍질에서는 살이  냄새가 난다//  검붉은 연기로/ 비와 바람, 구름과 무지개와 녹색 얘기 나누는// 영각이  벗으며/ 빛을 굳혀가는 시간// 대와 가지들에서는/ 레드빛 언어들이/ 하늘에 피어간다// 영각이 머리칼 날리며/ 자유론 넋의 기발을 날리는 시간.

  리순옥 2019 2월호 <봄의 나무>

 

  생명개체의 성장과정을 영각의 회복과 빛이란 이미지로 이끌어준 시적 발상이 돋보인다. 실존의 의미란 살이 타면서까지 자신을 연소시키면서 빛으로 굳혀간다는 생명의 용기와  경외를 존엄성있게 보여준다. 경건한 자세로 개체에 몰입했을 때만이 느껴질  같은 검붉은 연기 보여지는 대와 나무가지와 레드빛 언어들이 하늘에 피어간다 시인의 감수성은 예민하면서도 화려하고 긍정적이다. 삶의 성장통을 각성의 과정과 자유의 빛으로 크는 시간으로 해석한  시는 나름대로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저 나무잎이었을 뿐이었다/ 푸르렀던 낭만을 갑삭/ 감춰버리고  익던 / 호젓이밖에나와 한번/ 슬그머니 얼굴을 붉혀봤을 뿐이었다/ ……별숲을 바라보며 별잎과 동무하며/ 빨갛게 곰삭던 마음 한모퉁이를/ 허물어 빠끔히 한번 사랑이란/  한마디를 입새로 뱉어봤을뿐이었다/ ……남들 앞에/ 부끄러움을 여민 옷섶을 매만지며/ 그림자 같이, 잠자리 같이/ 가볍게 가볍게/ 마음을 고개 젓던// 그런 작은/ 작디작은 한잎의 입김 같이 부드럽고/ 여린 나무잎이였을 뿐이었다.

  김문세 20197월호 <단풍>

 

  영국시인 프란시슨 톰슨은 별을 흔들지 않고서는 꽃을 꺽을  없다 말한다. 세상만물은촘촘한 그물망을 이루기에  누구도 완전 독립된 개체로 존재할  없다는 의미다.  하나를 꺾었을뿐인데  멀리 별이 흔들리는  나비효과 위력은 얼마나 대단한가? 그런 의미에서 작디작은 한잎의 여린 나무잎 자처하고 한모퉁이에서 별숲을 바라보며 사랑의 입김을 토하는 나무잎은 결코 보잘  없는 존재가 아니다. ‘부끄러움을 여민 옷섶을 매만지며 ’‘가볍게 가볍게 마음을 고개 젓는 한잎의 나무잎사랑은   세상 모든 나뭇잎들의 사랑과 나뭇잎을 보는 이들의 사랑으로 연결되고  겸손과 순수한 부끄러움은 세상의 모든 겸손과 순수한 부끄러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마음을 곰삭이며’‘ 옷섶 매만지는 행위는 마치 과거  삶의 뒤안길에서 희생적 삶을 영위했던 전통적인 여성상으로도 안겨오는  하여  시는 사실 강렬하고 내밀한 은유의 힘을 갖고 있다. 이처럼 여린  나뭇잎이 가져오는 엄청난 사랑의 파급력과  부끄러움의 미학에 대한 시가 있다면 아래 박장길의 두편의 시는 각각 무한한 생명의 역동성과 부끄러운 나의 일상을 진지한 인간성찰의 미학적 행위로 풀이한다.

 

  새벽을 발로 차버리고/ 어둠을 밀고 나왔다/ 가슴에 둥근 새벽이 들어온다// 밤새 밤을 빨아/ 산마루에 널어놓은 새벽 위에서/ 아들을 낳는 아침에 나도 거듭난다//……유리창을 부시는/ 햇살을 업고 일어서서/ 성큼 앞에  있는 산아래/ 가득 쏟아지는 새소리들// 소리의 숲에서/ 땅냄새 맡으며 사랑 맡으며/ 진초록 생기를 떨치고/ 연두에서 초록으로 건너가리라/ 물길을 거슬러 쌓이는 모래톱으로/ 끝까치 사무치리라// 둥근 새벽을 지나/ 비둘기 물고 있는 아침에로 /  시가 무슨 가슴으로/ 사람들을 만나겠는지/ 어리석은 질문은 않기로 한다// 다만 알고 있다/ 좋은 물결에 좋은 산이 있다는 것을!

  박장길 201910월호 <둥근새벽>

 

  신화적인 상상력이 번뜩이는 가운데 죽음을 뚫는 생의 원리에 대한 애착과 집념이 신선한시각과 투명한 감각적 시어로 절도있게 마무리된 훌륭한 시작이라고 생각된다. ‘새벽을 발로 차버리고 ’‘밤새 밤을 빨아 산마루에 널어놓는 상상력의 구조는 회화적이고 기발하다. 모든 죽음을 생명의 출발점으로 인식하는 긍정적인 시각과 밝아온 둥근 새벽을 생명의 기본 바탕으로 전개된  시는 건강한 삶에 대한 진실한 체험과 희열을, 생명이 가지는 약동성과 맑은 색조를 감화력있게 펼쳐주고 있다. ‘유리창을 부시고 햇살 업고 성큼   대한 묘사나 물길을 거슬러 모래톱으로 끝까지 사무치리라 표현 역시 인상적이면서도 발랄한 시각적효과와 철학적인 사유가 묻어나오는 깊이를 지니고 있다.

 

  시간이  여물어/  여문 시간이/ 한개씩 한개씩 떨어지는/  가을날, 아침을/ 새소리 찍어간다// 나도 누군가의 시간의 사과배/ 한알이 아닐까// 사과나무에서 나를 따서 먹는다/ 속살이 차오른/ 땅의 / 땅의 / 땅의 // 하늘땅 먹고/ 우주의 맛으로 고여올라/ 해마다 주렁주렁/ 나를 열지만// 한알도 손수 따지 않는/ 지고의 침묵 위에/ 무거운 고요 속에 나를놓는다/ 머리 숙여 허리 굽혀/ 나를 드린다// 가을이어/ 나를 벗겨버리는 서리발이어!

  박장길 201910월호 <나를 벗겨버리는 가을이어>

 

  박장길 시인의 시어들은 정교하게  빚어지어 있고 기발하다. ‘ 여문 시간이 한개씩 떨어지는 가을아침 새소리 찍어간다 묘사는 대상에 몰입하지 않고 또한 예리한 시적감각의 날을 세우지 않고서는 예사롭게 표현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맑은 생기를 가져다주는 표현력들이 그의 철학적인 사고와 어울려 그의 시들은 한결 지성적인 면모를 띠게 한다.  시에서는  가을이란 대상과의 관계 재설정 속에서  대한 성찰을, 나의 부끄러움들을 무거운 고요와 지고의 침묵으로 존재를 품어주는 가을의 원리 속에서 설복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 속에서 인간성찰의 겸손성과  미학적 행위를 따뜻하게 보여주는 시라고   있다

  이러한 행위 미학은 비단 성찰 적인  모습 뿐만 아니라 나무의자 라는 개체를 통해서도 연출되기도 한다

 

  나무로 태어난 깊고 푸른 수림/ 떠날  울렸을 톱질, 대패질 소리/ 단단한 망치질에 험한  박힌 / 의자가 되어 내게로 와준 나무// …… 피곤한  무게 한꺼번에 맡기면/ 삐걱삐걱 소리내며 억울해하고/ 그럴 때마다 속으로는 몇번씩/  소파로 바꾸어볼까 생각하지만// 방석으로 딱딱한  가려가며/ 소파인  여기며 편한 척해보던/ 지꿎은 허영과 욕심에 들통났던/ 가난한 꿈을 서로 알아보기에// 힘들  제일 먼저 찾게 되고/ 올동안 앉으면 뼈마디 아픈/ 진저리나게 익숙하고  측은한/ 불편과 편함이 무르익은 나무의자

  유려 201912월호 <나무의자>

 

  생명의 의미와 삶의 초심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시다. 깊고 푸른 수림에서 못이 박힌 수난과 희생이란 운명으로 태어난 나무의자는 한철 의자로 살다가 다시 수림의 역사로 되돌아  것이다. 사람의 무게와 잡동사니의 무게까지  몸으로 감내하며 살아가기, 때론 억울해서 소리를 질러보는 한계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그래도 의자로서의 소명을 끝내 완성하고 돌아갈 때는 소파와 같은 고급스러운 존재들이 불러오는 환경오염없이 깨끗하게 연소되어 가거나 혹은  속에서 좋은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종래로 허영과 욕심이란 가난한 꿈을 가져보지 않은 나무의자이기에 때론 불편하지만 편한  이상의 역설적인 미학을 가져온다. 무소유의 , 그리고  몸을 던져 희생하는 나무의자에서 우리는 살아오면서 과연 어떠 초심을 상실했는가고 물어야  것이다

  이제 남은 아래 시편으로써 무엇이 경이로운 생명이고 존중받아야  생명인지를 북방사나이의 시각에서 강렬한 레드빛 시어를 통해 보여준 시를 소개하려고 한다.

 

  창가에/ 하연 성에가 내려앉으면/ 북극의 햇빛은 차겁다/ 고색의 쏘피아광장/ 가로등의 은은한 불빛도 차겁다// 흥안령에는 차거운 햇빛을 먹는/ 엄동의 겨우살이와/ 이른 봄의 복수초 같은/ 생동하고 영롱한 것들이 있다// 창밖의 설경을 마주해서/ 서리 같은 회초리 맛과/ 두툼한 아버지 손등을 생각하면/ 그리고/ - 얼어터지며/ 근육 키우는/ 바위고개 박달나무를 생각하면// 하루종일/ 머리 위의 해만 앙망하던/ 노오란 해바라기 꽃이 지는/ 어느 여름날이 슬퍼진다// 창가에/ 하얀 성에가 내려 앉는 / 뛰쳐나온 아이들은/ 토실감자 손으로/ 팽이를친다/ 극기놀이를 한다/ 겨울 햇빛은 춥다

  김춘산 2019  3월호 <겨울 해빛은 춥다>

 

  북방의 겨울 이미지와 남성적 이미지가  결합되어 생명 극기 의미를 설득력있게 부여한 시다. 광활한 시야를 확보해주는 광장이란 공간이미지와 무한한 생명력을 상기하는 흥안령이란 배경 속에서 민초들의 강인한 몸짓과  무궁한 에너지를 생동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추위를 뚫고 성장을 지향하는 역동성에 무게를  것보다 회초리맛 아버지의 손등 거친 올바른 성장지향에 의미를 두었다는데서 무엇이 진정한 생명의 극기인지를, 또한 무엇이 영롱 생명의 바탕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맺음말

  문학평론가 이택권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시가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엇을, 설렘을, 위로를 되찾아 주어야 한다. 어두워진 마음에 등불 하나 걸어 주고, 언어의 쌀로 배고프지 않게 해주고, 그래서 우리 생은 따뜻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항의 섞인 물음을 던져 주어야 한다.”
  역사 속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은 영혼의 허기를 멈추어 본적이 없는  같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의 쌀로 다양한 장르의 문학적 빵을 빚는 작업은 지금까지 줄기차게 이어왔고  중에서도 시는 전광화석같이 번뜩이는 지성과 감성의 교감으로, 달빛 밝은 산사의  영민하고 깊은 종울림으로 상처입은 영혼들을 다독이고 치유해 왔었다. 오늘도 신의 죽음이 계속되는 , 현대사회 고도의 물질 문명이 불러오는 정신사적 문제들이 날카로운 날을 세우면서 현대인들의 영혼을 불안하게 떨게 하였다면  치유를 위한 일환으로 따뜻한 감동과 공감을 주는 소박한  읽기를 감히 권장하고 싶다
  현학적인 시도 아니고 기교를 뽐내는 시도 아니며 무분멸한 비애나 지극히 개인주의 적인 정서에 젖어 들어 독자를 난처하게 하는 시도 아니다. 혹은 진부하고 설교적이며 직설로 일관된 시도 아닌  겨울 따뜻한  잔의 홍차처럼, 우리의 추운 마음을 맞춤하게 데워주고 거친 마음을 윤기 돌게 해주는 그런 시면 족하다
  2019년도 연변문학의 전반 시를 읽어보면서 시대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영혼에감동을 선사하는 시들을 필자 나름대로 선정하여 시평을 진행하였다. 다만 위의 시들이 더욱더 훌륭한 평가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졸렬한 시각이 시평에 누를 끼칠까봐 한편 걱정이 된다. 또한 필자의 제한되고 편협한 시각을 벗어나서 사실  많은 우수한 시작들이 2019 연변문학의 한해 결실을 값지게 했다는 점에는 애누리 없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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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프로필

1977년 2월, 흑룡강성 상지시 출생

2004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석사 졸업

국내외 간행물에 다수의 논문과 평론  약간의 시작 발표. 평론 <그대와 풍경을 찾아가는 길에서>로 제39회 <연변문학>문학상 신인상 수상.

현재 산동 옌타이대학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 교사로 재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