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 바람이 거셀수록 더욱 높이 난다
—칭다오창미달전기유한회사 김창호 이사장
프로필;
이름: 김창호( 金昌浩 , 42세)
1993년 가목사공학원 졸업
칭다오창미달전기유한회사 이사장
칭다오조선족기업인협회 회장
전국조선족기업인협회 부회장
세계한상대회운영위원회 위원
교남시정협상무위원
교남시소수민족연합회 회장
칭다오 교남시에 자리잡은 창미달전기유한회사 뜰에 들어서니 공장건물 위에 중국어로 된 '昌美达'이라는 세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창미달' 회사 이름 또한 깊은 뜻이 담겨져 있었다. 창성번영을 의미하는 자신의 이름 중간글자 창(昌)자와 아름다운 제품을 의미하는 부인(김미옥)이름 중간글자 미(美)자를 따다 거기에 목표달성을 의미하는 달(达)를 합성한 것이다.
생산현장으로 들어가는 현관에서 신을 바꾸어 신도록 돼 있었으며 '5S가 없으면 곧 품질도 없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5S의 골자는 '정리, 정돈, 청소, 청결, 소양'이다. 생산환경이 깨끗해야 노동자들의 정신이 건강하며, 소양이 있어야 '장인'정신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미달'의 재산은 1억위안, 연간 매출액은 2007년 1억7000만위안 최고봉에 달했다. '창미달' 규모는 칭다오조선족 업체 가운데 다섯손가락 안에 든다. '창미달'은 플라스틱사출품(85%)과 금형(15%)사업을 하고 있다.
김창호 사장은 '차갑다', '강하다'는 평가를 많이 받는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그러나 마음속은 '거절 못한다'고 덧붙였다. 정직, 신용, 헌신, 뚝심(저돌성) 4가지로 김 사장의 성격을 개괄할 수 있다. 김 사장은 '나의 길'과 '남자라는 이유로' 라는 노래를 즐겨 부른다고 말했다. 그의 강한 성격을 잘 나타내는 노래이기도 하다.
"나의 길은 내가 간다"
헤이룽장성 탕원현 탕왕조선족향 출신인 김창호 사장은 "3년이상 한우물을 파라. 그래야 바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하며, 열심히 꾸준히 하라"고 강조한다.
1993년 대학을 졸업한 김 사장은 일본기업들이 대거 밀려들던 1994년 칭다오로 진출했으며, 대학에서 전자기술을 전공한 우세를 발휘하여 칭다오에 정착한 삼미(미쯔미)일본 회사에 취직했다.
김 사장은 2001년 연말까지 8년동안 이 회사에 근무하며, 근면, 성실문화를 몸에 익혔다. 처음 1년동안은 일본인들과 대화가 안돼 사전을 들고 다니며 열심히 일본어 공부를 했다. 1년후부터는 일본인을 만나면 입이 절로 열렸다. 일상 대화가 가능해져 일본관리들과 소통도 잘 이루어졌다.
어느날 일본사장이 그를 사무실로 불러 어깨를 두드리며 "긴쌍(김동무), 일본에 가서 키워줄게"라며 일본연수를 제안했다. 당시 일본회사 내에 일본어를 유창하게 하는 조선족 직원만 해도 적지 않게 있었는데 일본사장이 유일하게 그를 점찍었다. 정직하고 신용을 잘 지키는 인간 됨됨이가 일본사장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일본연수를 1년 했는데 아침 8시부터 저녁 5시반까지는 현장에서 일하며 기술과 관리를 배웠고 , 저녁 6시부터 8시까지는 일본어교육을 받았다.
"그때 최고로 일본어를 많이 배웠다"고 김 사장은 회고했다. 중국에서 2번이나 일본어 1급 시험에 낙방했는데 일본연수 3개월후에 1급 시험에 합격하는 쾌거도 이루어냈다. 또한 그후에는 필리핀에서 온 연수생들을 상대로 일본어를 가르치기도 했었다.
2002년 김 사장은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해 부인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갔다. 2년동안 다른 일본 전자업체에 근무하며, 기술과 관리방식을 배웠고 인맥을 쌓았다.
김 사장은 "당시 일본에서 근무하면 먹고 사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독립적으로 창업하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단연 귀국했다"며 "한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는 두려움보다 하면 꼭 된다는 자신감이 컸다"고 말했다.
관리가 첫째인 일본기업에서 한우물을 파며 기술과 관리방식을 배운 밑천이 튼튼했기 때문에 그만큼 확신도 컸다. 그때 김 사장의 나이가 35세였다.
결국 김 사장은 한우물 파기 전략으로 홀로서기에 성공했다.
공은 닦은 데로 간다
김 사장은 일본에서 귀국후 2004년 4월부터 창업준비를 시작, 그해 8월에 정식가동했다.
김 사장이 귀국하여 창업한다는 말을 듣고 한 회사에서 2년간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친구가 10만달러(당시 80만위안)를 내놓으며 사업에 보태라고 했다. 김 사장의 정직함이 일본 친구에게 믿음을 주었다.
김 사장은 부인과 함께 번돈 80만 위안과 일본인친구가 빌려준 돈을 합쳐 총 160만위안을 종자돈으로 칭다오 황도개발구에 노동자가 20여 명 되는 작은 회사를 설립했다.
김 사장은 초창기에는 밤을 새며 기계설비를 조립하고 시험가공을 했다. 첫 제품을 가공할 때 연 며칠 실패를 거듭했다. 일본 바이어가 오기로 한 날짜가 하루하루 다가왔다. 마음이 잿더미가 되듯 타들어갔다. 그러나 김 사장은 입을 꾹 다물고 실험을 반복했다. 무엇이나 끝을 보고야마는 김 사장의 '뚝심' 이 빛을 보게 됐다.
일본 바이어가 오기로 한 날 아침 새벽에 샘플이 나왔다. 김 사장은 그길로 옷을 갈아입고 일본 바이어를 만나 첫 오더를 받았다. 참말로 고비사막에서 물을 찾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난 짜릿한 기분이었다. 입소문을 타고 오더가 하나둘씩 늘어났다.
창업 이듬해인 2005년 3200만위안의 매출을 올려 대성공을 했다. 김 사장은 운영자금이 딸리는 상황에서도 그해 연말 일본 친구가 빌려준 10만달러를 우선 상환해주었다. 그리고 2007년에는 사례금으로 420만위안을 일본친구에게 주었다. 올해 46세 되는 그 일본친구는 노동자로 일하며 어렵게 살면서도 "회사 경영이 어려우면 다시 가져다 쓰라"며 사례금으로 준 돈을 은행에 몽땅 예금해두고 일전 한푼 쓰지 않고 있다고 한다.
연은 바람이 거셀수록 더욱 높이 난다
'창미달'의 매출액은 2006년에는 7000만위안으로 배로 늘어났다. 2007년에는 오더가 눈덩이처럼 굴러들어 1억7000만위안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세계금융위기 영향으로 2008년에는 1억5000만위안, 2009년, 2010년에는 1억3000만위안으로 줄었다. 2011년에는 글로벌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매출액이 8000만위안으로 떨어졌다. 올해는 일본경제의 영향으로 7000만위안으로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금융위기와 글로벌위기를 맞아 너무 순리롭게 달리던 나이 어린 '창미달'은 하늘을 찌를듯 하던 기세가 누그러들긴 했지만 김 사장의 '뚝심'만은 꺽지 못했다. 김 사장은 "마음을 합쳐야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플라스틱사출품 오더가 줄어들자 금형사업에 대한 핵심기술 투자를 늘여 올해부터 금형 내외가공을 개시했다. 지난해 금형가공 매출액이 800만위안에 달했는데 올해는 이미 900만위안을 돌파, 연말까지 주문이 40%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금형가공 주문을 더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김 사장은 "현재 기반은 잡았다" 며 "향후 20년내에 한가지 히트상품을 출시하는 것이 꿈이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60세까지는 분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현재 금형설계, 프로그램설계 연구원이 12명 되는데 향후 40-50명으로 늘이면 신제품 연구개발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개개인 사람들이 모두 쓸 수 있는 생활에 꼭 필요한 용품을 개발하고 싶다. 상점에 다니며 아이템을 잡으려고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신제품개발때에는 바이어와 함께 밤을 새운다. 밤낮 없이 실험하고 고치고 한다. 2-3일 연속 집에도 못가고 쇼파에서 30분씩 새우잠을 잔다. 이렇게 20-30일씩 보냈다.
말수가 적고 웃음이 적은 김 사장은 "늘 있는 일이다"며 소탈하게 웃었다.
'바람이 거셀수록 연은 더욱 높이 난다'는 속담은 김 사장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하다.
'사회책임' 공명에 눈물을 흘리다
"사회적인 책임감이 중요하다. 책임감이 있어야 사회가 윤활할 수 있다.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어야 한다"
김 사장은 늘 이렇게 말했고 또한 행동에 옮겼다. 김 사장은 서울대학에서 공부하는 하얼빈 출신 조선족학생의 가정이 어렵다는 말을 전해듣고 지난해부터 매년 3만위안씩 대주고 있다. 올해 칭다오정양조선족학교에 칭다오조선족기업인협회 회장단이 30만위안을 기부했는데 김사장 본인이 5만위안을 기부했다.
또한 올해 여름부터 고향인 탕원현조선족중학교에 매년 3만위안씩 연속 10년동안 장학금을 지원키로 했다.
올해 여름 칭다오에서 전국조선족기업인협회 경제포럼이 열렸는데 선양의 표성룡 사장이 (전국조선족기업인협회 회장) "때론 자금이 딸려 고리대를 쓸 때도 있지만 학생들이 편지를 보내와 어려움을 호소하면 20-30명에게 일인당 1000위안씩 보내 준다" 며 "나도 인간인데 왜 향수를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면서 자신이 지난온 경험을 아주 솔직하게 실토했다. 연설을 마치고 강당에서 내려오자 김창호 사장이 달려가 표성룡 사장을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전경이 벌어졌다. 김 사장의 마음에 순간 공명이 일었던 것이다.
그렇게 남보기에는 '차갑고 강하던' 김창호 사장도 '사회책임'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사회책임'이라는 공명이 일어 흘리는 눈물은 정말로 값진 눈물이 아닐 수 없다.
/이수봉 박영만 기자 lixiufeng@hljxinwen.cn
날짜 : 2012-10-17 (수
성실과 근면을 토대로 자수성가 -김창호
청도창미달전기기계유한회사 김창호 이사장의 이야기
청도창미달전기기계유한회사를 찾아가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교남시내쪽으로 1킬로쯤 내려가면 왼손 편으로 산뜻한 인테리어를 한 4층 건물이 유표하게 눈에 띄운다. 옥상에 '창미달(昌美达)'이란 큼직한 간판만 내걸지 않았어도 고급 주거용 아파트로 착각하기 쉬웠다. 총 건축면적이 12,600㎡에 달하는 이 건물은 임대건물이 아니라 2004년 3월에 설립한 '창미달'이 2005년 연말에 구입한 자체 소유의 건물이었다.
취재수첩에 기록된 대로 이 회사의 김창호 이사장을 찾았다. 현재 청도조선족기업협회 대리 회장을 맡은 김 이사장은 올해 38세에 난 젊은 경영인이었다.
"뭐 별로 성공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일을 하다보니 여기까지 온 거구요."
깨끗한 회사 가운 차림의 김 이사장은 성공담을 얘기해달라는 기자의 요구에 조용히 대답했다. 일견에도 말수가 적고 겸손한 분이란 걸 보아낼 수 있었다.
흑룡강성 탕원현에서 출생한 김창호씨는 1994년 가목사공학원을 졸업, 학교에서 전자기술 전업을 수료한 그는 친구의 소개로 그해 7월 청도 모 일본전자회사에 취직한다. 3,800여 명 직원에 조선족 출신 관리자만 74명에 달하는 이 일본전자회사에서 1년 반가량 열심히 일하던 김창호씨는 같은 업체의 다른 일본 사장의 눈에 들면서 일본행을 하게 된다.
"성실하게 일만 했던 덕분이었는가 봅니다."
그 많은 관리자중에서 유독 자기가 선택될 수 있었던 그 이유를 김창호씨는 이렇게 간단하게 해석했다.
그렇게 일본으로 가서 삼미전자(미쯔미덴끼)에서 몇년간 일본인들과 똑같은 노임을 받으면서 부지런히 일했다. 원체 학교에서 배운 밑천이 있는데다 세계적인 첨단기술기업에서 여러 해 동안 직접 부딪치면서 꾸준히 배운 보람으로 김창호씨는 어느새 그 방면의 전문가가 되어있었다. 설비투자, 원가계산, 생산관리, 노무인건비, 마케팅루트, 바이어관리 등 제반 분야를 손금 보듯 훤히 꿰뚫었다. 중국 투자환경이 날따라 개선되면서 일본, 한국기업들이 대폭 중국으로 진출하는 것을 본 김창호씨는 창업 찬스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2004년 초 결연히 귀국의 길에 올랐다.
타이밍은 맞았으나 창업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선 자금이 결핍했다. 금형기계 제조란 금형 하나에 20만 위안, 비싼 건 300-400만 위안씩 하는 설비 투자가 엄청난 업종이었다. 김창호씨는 낯이 간지러웠으나 별수 없이 일본 친구한테 손을 내밀었다. 상대방은 김창호씨의 얘기를 듣고 두말없이 20만 달러를 구좌에 넣어주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일본인의 무조건 신뢰를 받으면서 김창호씨는 여직껏 몸으로 익혀온 노하우인 성실, 근면, 신용 이런 낱말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깊이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모자랐다. 김창호씨는 대만 메이커한테도 3할을 선불하고 설비를 가져왔다.
"저 자신이 담보입니다!"
절대로 손해를 자초하지 않는 대만 상인들 앞에서 김창호씨가 당당하게 나서자 메이커들은 거짓말같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2004년 3월 21일, 황도개발구에 드디어 사출기 6대에 30명 직원의 '창미달전자유한회사'가 출범식을 올렸다. 김창호씨는 직접 생산현장에 나가서 직원들과 함께 일했다. 기계를 조립할 때에는 3박 3일동안 회사에서 먹고 자면서 일했다. 김창호씨는 경영자이면서 또 기술자였고 관리자이면서 또 마케팅으로 1인 다역을 하느라고 거의 쉴 새가 없었다.
"가장 넘기기 어려웠던 것은 생산된 제품이 바이어의 승인을 받기까지었습니다."
거의 100% 일본 수출, 일본 바이어들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런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김창호씨는 철저한 준비를 갖추었다. 처음 바이어들이 회사에 오기로 약속되었을 때 김창호씨는 직원들과 함께 새벽까지 라인을 깔면서 시생산도 가동, 그래서 바이어들이 왔을 때에는 완전한 제품을 내놓을 수 있었다. 그 고비를 넘기자 회사는 승승장구의 일보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 해 말로 매출 400여 만 달러를 이루었고 남은 이윤으로 설비 재투자와 기술자 양성에 깡그리 퍼부으면서 2005년에는 매출액이 20배 이상 뛰어올랐다. 따라서 2006년에는 1500만 위안을 투입하여 교남시 개발구에 공장건물을 새롭게 구입하여 '창미달전기기계유한회사'도 건립했다. 고작 30명으로 시작한 '창미달'은 현재 황도, 교남 두 공장에 620여 명 직원을 두고 있으며 연간 매출이 2,800만 달러에 달하며 플라스틱 사출기를 포함한 여러 가지 선반기계가 130여 대, 고정자산이 1억에 가깝게 되었다. 빈손으로 4년 좀 넘는 시간에 이루어낸 기적이었다.
고부가가치를 가진 업종이라 달러 값어치가 떨어져도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창미달'은 앞으로 2년 반 동안의 오더까지 받아놓은 상태, 이 오더 하나만 1년에 천만 달러가 넘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디자인 받아서 금형 설계하고 생산, 납품하는 모델이지만 앞으로 꿈은 제품개발을 하는 겁니다. 금년안으로 30명 정도의 전문인원을 모아서 기술개발팀을 묶을 타산입니다."
초창기에 어려움을 함께 했던 30명 직원이 하나 빠짐없이 남아있다면서 김창호 이사장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기업에서 가장 중요한 인소가 인재라면서 직원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회사는 미래가 없다고 단언했다. 청도에서 많이 보아온 일이지만 직원을 홀대한 기업치고 제대로 된 기업이 없다면서 '창미달'에서는 인건비를 낮추는 대가로 이윤을 추구하는 해묵은 작법을 종래로 도입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국경절이나 특별한 기회에 우수한 직원을 뽑아 해외여행을 시켜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연노임 50만 위안으로 일본인 기술인도 초빙했으며 새해에 또 한명이 온다고 밝혔다.
'창미달'은 사회공헌에도 눈길을 돌려 지난 사천지진때에는 6만 위안을 헌금했으며 얼마전에는 벽산조선족학교와 청도조선족노인협회에 2만 위안에 가까운 도서를 기부하기도 했다.
/장학규 특약기자
날짜 : 2008년 10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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