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회 재외동포문학상 체험수기 대상작(2019년 12월)

 

전설처럼 살다가신 할머니

박영희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지난 세기 60년대로 지금과는 달리 생활 형편이 째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월급을 타서는 전부 할머니에게 맡겼다.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나셨는데 마치도 마술사처럼  맛있고 색다른 음식을 만들어 내곤 하셨다. 손맷돌을 돌려 두부, 노란콩쌀죽, 녹두지짐을 만드는가 하면 겨울에는 엿을 달이고 순대를 만들고  시루떡, 증편, 오그랑죽 등은 할머니의 손에서 엇갈아 빙빙 돌아 가면서 그처럼 손쉽게 만들어  수가 없었다. 식구가 단출했지만 친척들이  사이 없이 드나드는 통에 우리집 밥상은  끼도 조용할 사이 없었다. 할머니는  여유 있게 만들어서는 먼저 가까운 이웃에 일일이 돌렸고 겨울이면 얼려두었다가 다시 쪄서는 밥상 위에 내놓곤 하셨다. 매번 할머니의 손끝에서 탄생한 맛깔스러운 음식의 깜짝쇼가 있을 때마다 기쁨의 함성과 함께  집안 식구들의 얼굴에는 행복의  웃음꽃이 피어나곤 하였다.

그때 중국 동북 지역의 겨울은 그렇게 매서웠던지. 사람마다 두꺼운 솜바지와 솜저고리에 솜신까지 신고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막을 없어 덜덜 떨었다. 추운 새벽이면 따뜻한 이불 속에서 항상 불을 켜고 바느질하는 할머니를 볼 수 있었다. 때론 철없는 내가 불빛이 시끄러워 시계를 쳐다보면 바늘이 새벽 두세 시를 가리켰다. 할머니의 매일 일과는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시작된다. 겨울마다 이맘때면 할머니는 싸늘한 새벽 공기를 무릅쓰고 집의 모든 이부자리와 솜바지, 저고리를 다시 한번 깨끗이 씻어  손바느질로 수선해 놓으셨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한 온돌 구들에 차려 놓은 김이 몰몰 피어오르는 아침밥을 있었다.

그때는 집집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수돗물을 길어서 먹을 때였다. 우리 집에는 아주 큰 지독으로 된 물항아리가 있었는데 큰 물통으로 13통이 들어갈 수 있었다. 아침 설거지가 끝나고 집을 말끔히 거둔 후면 할머니는 물을 머리에 이어서 날랐는데 큰 물독에 넘치면 가마에 넣고, 다음 통을  길어 물독 위에 올려놓고야 그만두셨다. 할머니는 매번 물을 길을 때는 독 밑을 말끔히 굽을 내어 씻었고 또 이렇게 하루건너 물을 길었는데 어떤 일을 하나 아무리 힘들어도 깔끔하면서도 단숨에 끝을 보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 맺고 끊는 성미였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어린 시절을 추억하노라면 옛집에서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닦고 닦아 항상 새로 기름칠한 반들반들 윤나는 노란 장판과 원목 가구들, 그리고 알뜰한 저녁 밥상을  차려 놓고 전등불을 환히 밝히고 바느질하면서 식구들을 기다리던 할머니의 옆모습이 그림처럼 떠오른다. 할머니가 계셨기에 나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 아버지가 바삐 보내면서 집에 계시지 않은 수많은 썰렁하고 가슴 저린 고독한 나날도 행복으로 메울 수 있었다.

1969년 5월 30일, 아버지와 어머니가 의사인 우리 집은 “의료공작의 중점을 농촌에 두어야 한다”라는 나라의 지시와 정부의 안배에 따라 편벽한 시골에 내려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때 이미 80세에 가까웠던 할머니는 농촌 마을에 오시자 마치 몇십 년간떠났던 고향마을에 다시 돌아온 기뻐서 어쩔 몰라 하셨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부터 집 앞에 분배받은 기름진 300여 제곱미터 남짓한 자류지와 뒤에 있는 여러 가지 풀로 덮여 있는 대면적의 가파른 산등성이를 돌고 돌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며칠 밤을 쉬지 않고 뒤척이며 어떻게 그 땅을 충분히 이용할 것인가에 대해 즐거운 고민을 하셨다.

우리가 이사하였을  자류지에는 이미 담배모가 옮겨졌을 때였다. 할머니와 나는 먼저 변두리에 해바라기씨와 강낭콩씨을 심고 이어 뒷산에는 호박씨를 박았다. 가을이 되자 원래부터 기름진 담배밭 변두리의 해바라기는 키를 넘게 자랐고 줄기가 어른들의 팔뚝만큼 실했으며 씨가 들어앉은 이삭은 크기가 어른들의 팔로도 안을 없게 컸는데 직경이 모두 50센티미터 넘었다. 그런데 씨가 막 영글어 가고 있을 때 하루에 몇 번씩 난데없는 참새떼들이 새까맣게 덮쳐드는 이었다. 할머니는 허수아비를 세우고 줄을 길게 늘이였고 거기에 방울을 달았다. 떼가 오면 할머니는 줄을 흔들면서 “훠이, 휘이-” 하고  소리로 외쳐 떼를 쫓곤 하였다. 도시에서 자란 나에게는 이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하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뒤에 있었다. 가을이 되어 해바라기씨를 털어보니 큰 마대로 개나 되었다. 할머니는 또 병아리 50마리를 키우고 강아지 마리도 사다 놓으셨다.

가을이 되니 할머니는 일찌감치 다음 해의 계획을 세우기에 바쁘셨다. 할머니는 앞마당 가까운 곳에 채소 심을 곳을 내놓고 전부 찰수수를 심었다. 100% 한전 지대인 그곳에서 기장쌀, 차좁쌀은 있지만 찰수수는 드물었다. 기름진 자류지에 심은 찰수수는 매일같이 우쭉우쭉 탐스럽게 잘 자랐다. 가을이 되어 할머니는 남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찰수수를 세 마대 거둬들였다.

나날이 많아지는 닭무리에서 수탉은 잡아먹고 암탉으로는 병아리를 깨워 알닭인 암탉만 50여 마리로 부쩍 늘어났다. 할머니는 매일 달걀  광주리씩 주워 담았다. 그런데 닭이 곳곳에 널려 말썽을 부리는 까닭에 채소밭 변두리에 울타리를 만들지 않으면 되었다. 할머니는 남새를 년에  차례 심었는데 초봄에는 시금치, 햇배추, 파를 심고 다음은 그 자리에 고추, 가지, 토마토, 오이 모를 내고 끝으로 , 영채와 같은 늦가을 남새 씨를 뿌렸다.

그때는 도시나 농촌이나 막심한 식량난을 겪을 때였는지라 한전 지대인 이곳 대다수 집에서는 무를 채로 썰어 놓고 위에 좁쌀을 조금 넣어 무밥을해서 끼니를 때웠다. 지금은 무로 영양밥을 짖기도 하지만 그때는 굶주린 배를 채우는 수단이었다.  

우리 집은 도시 호적이기에 식량은 집과 4~5리나 멀리 떨어져 있는 공사마을(향)의 식량 공급소에 가서 인구 당으로 배당되는 쌀을 와야 했다. 그나마 입쌀은 몇 근 되지 않고 모두 옥수숫가루와 같은 잡곡뿐이었다. 그러니 할머니가 지은 농사가 얼마나 보탬이 됐는지 모른다.

할머니는 마치 모르는 기계와 같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내가 감탄하고신기해한 것은 모든 일을 할머니는 마치 평범한 매일의 일과로 해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때나 할머니는 눈에 띄게 힘겨워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조용히 하나하나 진행해 나갔다.

 1971년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나라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도시로부터 ‘5.7’ 하향 간부들이 연이어 농촌으로 자리 잡았는데 그중 집은 우리 집과 비교적 가까운 곳에 여섯 식구의 이삿짐을 부리고 자리 잡았다. 그런데 온돌의 구들돌을 잘못 놓아서인지 불을 때면 아궁이로부터 연기가 곧장나왔다. 그 추운 겨울 사람들을 불러와 서너 번이나 고쳤으나 매번 마찬가지였다.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가 말없이 가서 일하는 것을 지켜 보시더니 참지 못하고 손을 걷고 나섰다. 부뚜막과 온돌 고래를 조금 드텨 놓고 이겨 놓은 흙을 척척 바르더니 20여 분 후 손을 씻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그러자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농촌에 내려간 명절을 쇠면서 처음으로 개를 잡을 때였다. 그때 농촌에서 자란 사촌 오빠들도 있고 친척들도 몇 명 있었지만, 할머니를 빼고는 누구도 개를 잡아 경험이 없었다. 먼 옛날 생계를 위해 육개장집을 경영한 적 있는 할머니는 자신이 나서면 젊은이들이 체면이 서지 않는다고 손을 흔들면서 돌아앉았다. 그런데 이튿날 잡이에 나선 오빠가 개를 놓고 어정쩡 주춤거리자 결국 할머니가 나서야 했다. 모두들 할머니의 그 칼 쓰는 솜씨에 놀라움과 감탄을 감추지 못하였다.

해방  할아버지 형제는 전부 항일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혁명의 저조기에 토벌대의 대도살을 피해  소련으로 떠났다. 둘째인 우리 할아버지도 형님을 따라 소련에 가셨고, 얼마 형제가 전부 소련에 모여서 활동하였다. 집에는 노인과 여자들 뿐이었다. 집은 가난에 쪼들려 가고 본래 3대가 모여 살던 대가족은  없이 분가를 하게 되었다. 그때 할머니는 남매,  나의 큰아버지(8살), 고모(4살), 둘째 큰아버지(2살)을 데리고 나오게 되었. 셋째인 아버지는 출생 전이었다.

할머니는 그때 생활의 쪼들림보다 아버지 없이 자라는 애들이 마음에 걸려 안절부절못하였다. 할머니는 소련으로 할아버지를 찾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비용을 마련하려고 할머니는 장사를 시작하였다. 할머니는 이를 악물고 돈을 꾸어 먼저 떡장사, 두부 장사를 하였는데 주로 머리에 이고 여러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팔았고  후에는 작은 가게를 얻어 국밥집을 차렸다. 붙임성이 좋고 음식 솜씨가 좋아 장사가 아주 되었는데 주위의 장사꾼들이 손님을 쓸어간다고 질투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2년간 애써 모은 돈으로 소련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지금이나 예전이나 변경은 항상 봉쇄가 엄밀하지만,당시는 국세가 긴장하였으므로 비상 상태였다. 소련 쪽은 더욱 감시가 철저했다. 붙잡히면 큰일이었다. 세 아이를 데리고 농촌 아낙네가 보따리를 이고 지고 남편 찾아 비밀리에 변경을 넘는다는 것은 모험에 모험을 더한 엄청난 일이었다. 들리는 소문마다 더욱 무시무시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결심은 조금도 흔들림이 었다.

변경을 넘으려면 든든한 길잡이가 있어야 했다. 변경에 밀수쟁이들이 들락날락하기에 길잡이꾼들도 많았고 사기꾼들도 많았다. 강을 건너고 밀림을 지나야 하는데 나쁜 길잡이를 만나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라고 한다. 밀수꾼들은 위험에 처하면 날 살려라 하고 혼자 뺑소니를 치는데 대방을 전혀 책임지지 않는다. 할머니는 믿음직하고 길이 익숙한 사람을 하나 물색하였다. 그런데 할머니의 사정을 알고는 손을 마구 흔들면서 거절하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없이 다른 사람들이 내는 배의 돈을 내걸고 사정하여 끝내 대답을 얻었다. 할머니는 짐 개를 만들어 하나는 당신의 머리에 이고 하나는 등에 지고 다른 하나는 큰아들의 등에 지우고  그다음 작은아들의 손을 잡고 캄캄한 밤에 쥐도 새도 모르게 타향 길에 올랐다. 그런대로 길잡이 덕분에 변경은 무사히 넘었고 다만 보따리 하나만 건널  물살에 밀려 떠내려갔다. 물을 건너 둔덕까지 오르고 보니 푸르무레한 새벽빛에 멀리 낯선 마을이 보였고 길잡이는 여기서 돈을 가지고 급히 자리를 떴다.

더욱 어려운 고비는 그다음 부터였다. 소련말 한마디 모르고 돈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당장 어린 자식들에게 끼니를 먹여야 하였고 손에는 할아버지 거처의 주소가 적혀 있는 종이쪽지를 달랑 하나 쥐고 얼마를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길을 이제부터 떠나야 했다. 그런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감시가 엄한 당시 소비에트 구역인  마을을 어떻게 무사통과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마을까지 가는 길은 무인지경이었다.

갑자기  멀리에서 타고 팔에 붉은 완장을 두르고 카빈총을 어깨에 순찰대가 마을을 돌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길에 나서기만 하면 붙잡힐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할머니는 잠시 숨어서 관찰해 보다가 순찰대가 사라지기를 기다려 애들을 이끌고 마을로 향해 반달음 쳤다. 마을에 도착하여 골목 하나를 빠져 큰길로 가로지르려 하는데 마을 어귀에 또다시 순찰대가나타났다. 다급한 할머니는 다시 골목길에 들어서서 이쪽저쪽 살피면서 마땅한 피할 곳을 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할머니는 어느 집 담장 안의 뒷마당에 널린 빨래 속에 흰 조선족 옷도 걸려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할머니는 조금도 주저 없이 짐들을  담장 뒤에 넘겨 놓았다. 다음 애들을 데리고 사립문을 떼고 들어섰다. 집안에 들어선 할머니는 다짜고짜 넙죽 엎드려 “사람 살려 주소서. 하며 손을 비비면서 사정하였다. 마침 아침을 먹으려고 밥상에 마주 앉았던 주인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일에 너무 놀라 엉거주춤 일어섰다. 생각대로 그 집의 주인아주머니는 조선족이었다.

할머니의 자초지종을 들은 그들은 불청객을 맞아들였다. 선량한 아주머니는 애들에게 아침밥을 먹인 남편과 한참 의논한 끝에 마을의 제일 분이며 당위원장인 사람을 찾기로 하였다. 오후가 되어서 당위원장이라 하는 사람이 집에 들어섰다. 그분은 할머니를 보고 당장 애들을 데리고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혼자도 아니고 여자가 아이 셋을 데리고   길을 찾아가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서였다. 할머니는 돌아가면 봉변을 당할 것이 보듯 뻔하니 어른, 아이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죽어도 길을 가야 한다고 있다고 제발 도와 달라고 손시늉을 해가면서 빌고 빌었다. 아주머니도 옆에서 통역해주면서 사정하였다. 드디어 주인집 아주머니가 보증 서고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소개장을 떼어 주었다. 지금은 돈만 있으면 어디도 갈 수 있지만 그때는 소개장이 돈보다 힘을 때였다. 할머니는 그 붉은 도장이 찍혀 있는 한 장의 소개장을 가지고 소련말 한마디도 모르면서 기차 타고,  타고, 걷기도 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15일 후에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어릴 할머니의 팔베개를 베고 소련에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듣기 좋아하였다.  많은 이야기도 이젠 거의 기억에서 어렴풋이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어제 일처럼 잊히지 않는 것은 그때 할머니가 기억하고 있는 소련말을 마디씩 섞어 가면서 흥분에 겨워 말씀하던 할머니의 모습과 할머니가 소련에 방금 도착하여 있은 가지 일들이다.

할머니는 난생처음으로 소련에서 그렇게 배를  보고 배를 타고  하룻밤 하룻낮을 달렸다. 할머니는 애들이 뱃멀미 하던 , 큰 선창 안이 우글거리는 사람 천지여서 옮겨 디딜 곳도 없는데 어린 고모가 열이 나면서 앓던 , 큰 배가 위험지대를 지날 크고 코가 높은 선원들이 삼각기를 들고 낯이 백지장처럼 되어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선창 안의 사람들을 지휘하여 꼼짝 움직이지 못하게 전부 누워 있게 하여 할머니가 “아차” 가슴이 철렁했고  낯모를 타향에서 애들과 함께 이젠 죽겠구나 하고 손에땀을 쥐고 긴장해 하던 , 그리고 기선에서 내려 짐꾼이라고 당시 그곳에서흔히 보는 쪽지게쟁이를 불렀는데 모르는 농촌 아낙네이고 애들이 딸려 있는 것을 보고는 업신여겨 앞에서 짐을 지고는 따라 오라고 하면서 자기는 반달음의 줄행랑을 놓는 것을 소리로 호통치면서 멀리까지 따라가 겨우 따라잡고 짐을 빼앗아 내던 , 온갖고생 끝에 할아버지가 계신 집을 찾아가니 할아버지는 그때 집에 계시지 않고 할머니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모여 동네 남녀로소가 앞마당과 울타리 밑에 둘러서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상봉을 지켜보려고 떠나지 않고 기다리던

 후에 일이었지만 이와 같이 이국땅으로 고생하며 남편을 찾아간 여자들은 처음 만날 남편과 대판 싸움부터 한다고 한다. 통신이 끊기어 사람을 통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는 시기여서, 이런 경우 남편들은 여자가 찾아오는 것을 미리 없었다. 그날 마침 할아버지는 외출하여 집에 없었고 할머니는 주인집의 도움으로 빈 집안을 거두고 쌀독을 찾아 점심밥을 짓고 있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애들을 거느리고 중국에서 찾아왔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없었다. 놀란 표정 그대로 집에 들어선 할아버지가 애들을 데리고 이 먼 길 어떻게 왔는가 하는 말에 할머니는 마치 마실 갔다 돌아온 남편 대하듯이 평소와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맞이하면서 “애들에게 아비 찾아 주려고 고생 찾아 이곳까지 왔다”라고 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박수를 치며 소련말로  “대단하다”, “좋다” 하고 탄성을 질렀다고 한다. 할머니는 그 후 소련에서 7년을 보냈고, 그때 아버지와 막내 삼촌이 소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5살 되던 해에 식구가 다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중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할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 ‘집을 나간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고 ‘사람 기다리기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울 때 고통을 조금이나마 잊게 해주는 것이 ‘일’이라고 자주 말씀하곤 하셨다.

할머니는 일생 기다림에 지친 분이시다. 젊었을 때는 집을 떠나 소련에 할아버지를 기다려야 했고, 항일 전쟁 때에는 담가대로 전선에 나간 큰아버지를 기다려야 하였고,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학질에 걸려 시체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다시 돌아온 둘째 큰아버지를 기다려야 했으며, 해방전쟁 때에는 형제 셋째인 아버지가 부대의 퇀급 군의로 비밀리에 부대와 함께 대이동한 소식이 끊겼다가 나중에 구사일생으로 돌아오게 기나긴 3년간을 피눈물로 기다려야 했다. 그때 집에는 병으로 움직이기 어려워하는 할아버지와 심각한 결핵으로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형제 넷째이며 막내 삼촌이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뿐인 (나의 고모)이 5살짜리 어린애를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고, 할머니의 맏며느리(나의 큰어머니)가 4살과 6살짜리 오누이를 두고 세상을 떠났으니  어린 것들은 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시름시름 앓던 삼촌도 20살의 젊은 나이에 끝내 할머니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 앞에서 울음소리  시원히 내지 못했고 몸이 아파도 앓아누울  조차 없었다. 자식들이 남겨 놓고 간 어린 것들을  보살피며 울음을 씹어 삼켜야 했고 빗발치는 총탄 속을 누비며 전쟁의 죽음의 변두리에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형제를 생각해서 마음껏 통곡할 없었다. 매번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할머니는 시도 때도 없이 호미를 찾아 들고 정신없이 밭으로 달렸다고 한다. 오직 그곳만이 할머니가 마음껏 물을 흘릴 있는 곳이었고 정신없이 일로 몸을 혹사하여야만 기나긴 밤을 보낼 있었다. 그때 할머니는 밤과 낮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도 깨어나면 다시 잠들 없었고 그러면 당연히 밭으로 향하였다. 달빛을 빌어 정신없이 김매고 있으면 먼동이 훤히 밝아오고, 이때면 다시 집으로 향하였다. 그때 할머니는 가정의 유일한 노동력이었다. 할머니는 여러 가지 자그마한 일로 속을 태우는 사람을 보면 위안해주며 이렇게 말하곤 하셨. “나는 죽은 아들을 옆에 놓고도 밥 굶지 않았소. 산 사람은 역시 살아야 하고 애들 입에 거미줄을 치게 할 수는 없었소.”

 할머니는 가난한 가정의 넷째로 태어나 8살에 박씨 가문의 둘째 며느리로 시집을 오셨다. 시집올 때 할머니는 이미 가사일은 물론 베로 옷을 짜고 바느질하는 등 일에 능숙했다. 어릴 때부터 일로 잔뼈가 굵은 할머니는 시집온 수많은 같은세대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대가족의 크고작은 가정일을 책임졌다. 하루 세끼 밥을 하여서는 음식은 마을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산골짜기의 밭으로 이어 날라야 했고 틈만 있으면 베틀에 올라 앉아 베를 짜고 밤늦게까지 손바느질을 해야 했고 밥알 같은 어린 자식들을 거느려야 했다.

그때는 전쟁과 약탈, 빈곤과 전염병이 쌍으로 성행하던 시기라 사람들이 숨도 크게 쉴 수 없는 고난의 연대, 동란의 시대였다. 추위와 굶주림 망국노의 슬픔에 마을의 젊은이들이 항일에 떨쳐나서기 시작했다. 집에는 항일하는 사람들이 들락거렸고 집의 뒷방 칸은 젊은이들이 모이는 아지트였다. 천성이 지혜롭고 솜씨 빠른 할머니는 비밀리에 항일하는 할아버지와 형제들의 밥을 나르는 일을 하였다. 때때로 토벌을 피해 산골짜기에 숨어 있는 친인들을 위해 산을 넘어 밥을 르고 소식을 전하는 일도 했다. 밤길에 산골짜기를 톱아 오르면서 덩굴에 긁히고 넘어져서 상처투성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온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옛날, 할머니의 시아버님(나의 증조부)은 28세의 노총각으로 혈혈단신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오는 이민의 물결을 따라 훈춘의 편벽한 마을에 정착하셨다. 전염병과 식량난으로 혈육을 전부 잃고 홀로 된 시아버지는 가족애와 일솜씨로 인근에 소문이 있었다. 부지런하고 인품 좋은 시아버지는 빈털털이 소작농으로 일하시면서 돈을 모아 장가들어 아들 형제를 보게 되었다. 시아버지는 빠지게 일하면서 아들들을 출세시키려고 이를 악물고 맏아들을 당에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형의 영향으로 아래 형제들이 모두 읽기를 즐겼다. 후에는 하나둘 집을 떠나 항일의 길에 들어섰고 후에는 유명한 항일 투사로 성장하였다. 그렇게 되자 집에는 여자들만 남게 되어 생활이 더욱 궁핍하였다. 생활의 중압감은 항상 할머니의 두어 어깨를 짓눌렀다.

  불행하게 중국의 최고 사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서 교도관으로 있던 맏시형이 유명한 광주봉기에서 부대를 영솔하여 포위를 돌파하다가 장렬히 희생되었다(연변 역사박물관 모셔진 영웅). 온 가정의 정신적 기둥이 무너지고 수시로 들이닥치는 토벌대의 수색 위험이 뒤따랐다. 항상 위험을 피해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업고 이끌고 부모들을 부축하면서 이사를 먹듯 해야 했다. 할머니의 맏동서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눈물로 세월을 보낼 때 할머니가 항상 옆에서 함께 울고 손을 잡고 위안해 주었다. 그때 가정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있는 사람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갸름한 체격에 강단 있고 날래었으며 언제나 부지런하고 깔끔하였다. 또 놀라운 기억력과 뛰어난 지혜를 가진 분이셨다. 고령이 되었어도 낮잠을 자는 것을 보지 못했고 일을 찾아 손이  사이 없었다. 동네방네 시집가는 새색시 이부자리를 장수 할머니가 꾸미면 복이 온다고 모셔 가면 솜씨 하셨고, 갓난아기 출생 때 장수 할머니의 속옷이 필요하다는 부탁에 만면에 웃음 짓고 속옷들을 내놓으셨다.

90세가 넘어서도 흰머리가 별로 없는 새까만 머리를 오리의 흐트러짐도 없이 반듯이 빗어 넘기고  부드러운 전으로 머릿수건을 쓰고 다녔으며 당시에 주위 사람들에게서 없는 옛날에 짰다는 베옷을 즐겨 입으셨고 속옷들을 의연히 풀을 먹여 다듬질하여 입으셨다.

개혁 개방 , 민속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서 종종 할머니를 찾아와 과거 역사에 대한 인터뷰를 하였다.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은 90여 세의 고령에 이른 할머니의 기억력과 말재주였다. 녹음기 앞에서 할머니는 두 시간 동안 잠깐 쉼도 없이 청산유수의 말솜씨와 또렷한 정신력으로 녹음을 하였다.

  나도 녹음테이프의 복사본을 들어봤는데 유머까지 섞어 가면서 옛일들을 재미있고 실감나게 이야기하셨기에 함께 듣는 사람들의 감탄과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대학을 다닐 할머니 인터뷰 현장에 동참했다. 할머니는 그때의 산골짜기 이름, 그 연대와 그 시대의 큰 사건인 토벌대의 대소탕 같은 것을 이야기하였다. 취재하러 온 손님은 역사 기록과 할머니의 말씀을 대조해 보면서 이야기를 유도했는데 연신 혀를 끌끌 차면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들이 보아도 할머니의 인생은 곧 하나의 민족 역사였던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1주년이 되는 날, 저녁 추모회에서 내가 할머니에 대해 추억하면서 “우리 할머니는 위대한 할머니시고, 영웅 할머니십니다.라고 했더니 바로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랜 침묵 끝에 어른 분이 나를 보고 한마디 하셨다. “너의 할머니는 우리 남자들도 인정하는 여호걸이셨다.” 사람들은 저마다 침묵 속에서 할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을 되새기며 저쪽 하늘나라에서 부디 영화와 행복을 누리시기를 묵묵히 빌었다.

  * 2019년 12월 “21회 재회동포문학상 체험수기 대상 수상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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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프로필

1957 12 출생.

1982 7 연변대학 화학학부 졸업. 2017 12 청도농업대학 정년퇴직.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