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엄마의 함지

정순금


내가 오빠네집에서 한창 텔레비죤를 보고 있는데 녀동생 영자가 마당에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엄마가 왔어”

나는 얼결에 후닥닥 밖으로 뛰쳐나갔다.

아니,이게 웬일이냐?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자주 들려주었던 아버지가 타고 오셨다던 그 검은 점박이 백마가 사립문밖에 턱 버티고 서있었다. 그우에는 노란 한복을 차려입은 어머니가 앉아있었다.

 “엄마---

나는 허둥지둥 달려갔다. 내가 사립문을 활짝 열어제끼고 백마 곁에 다가서자 어머니는 허리 굽혀 마를대로 바싹 마른 오른손으로 나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엄마 어디 가셨다 인제 오세요. 난데없이 웬 백마를 타고 있어요. 어서 내려요”

나는 엄마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순금아, 나 배고프다 어서 밥 좀 다우”

어머니는 당최 내릴 념을 않고 뜻밖에 밥을 구걸했다. 한옆에 멍해 서있던 영자가 듣다말고 후다닥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1분도 안되여 보온밥통을 들고나왔다.

“올캐가 아침에 지은 찰보리쌀 밥이래요. 그 안에 엄마가 좋아하는 가지채와 감자채가 들었어요”

“오냐 고맙다. 잘 먹을게 잘 있어라”

어머니는 녀동생이 넘겨주는 도시락을 받자마자 한마디 남기기 바쁘게 백마의 등을 쳤다. 백마는 “호옹옹” 소리 내며 앞발을 치켜들고 한바퀴 휙 돌더니 날파람을 일구며 동쪽을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엄마, 또 어데 가세요? 어서 돌아와요”

나는 어머니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그만 원통하여 자리에 풀석 주저앉아 땅을 치며 통곡했다.

“정신 차려요 정신 차려요”

누군가의 웨침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눈을 떴다. 꿈이였다.

“몸이 많이 안 좋네요”

고모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조카 며느리 선희가 눈물범벅이 나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나는 머리가 흐리터분해 꿈인지 생시인지 통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여전히 속에 엄마가 눈앞에 삼삼했다.

(아마 엄마가 저승에 가서 아버지를 만난 모양이지. 그렇기에 아버지가 탔던 그 백마를 타고 왔지)

어린 시절 우리 5남매는 어머니한테서 백마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언제 한번 엄마가 꿈을 꾸었는데 저승에 간 아버지가 검은 점박이 백마를 타고 와서 엄마더러 얼른 올라타라구 재촉했단다. 말을 타본 적이 없는 엄마가 어쩔 줄 몰라 갑자르다가 문앞에 놓인 빈김치독을 엎어놓고 그걸 밟고 백마에 올랐는데 그만 고무신 한짝이 땅에 뚝 떨어지는 바람에 엄마가 다시 땅에 뛰여내렸단다. 그 바람에 아버지가 화가 나서 나 바빠 먼저 돌아간다 고함 지르며  백마에 채찍을 가해 쏜쌀 같이 북망산으로 향했단다

(다행이지. 그때 그 고무신이 얼마나 고마운지 엄마가 백마를 타고 갔더라면 우리 자매는 고아가 되였지)

앙상하게 여윈 어머니가 구걸하던 불쌍한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얼른거려 저도 몰래 눈물이 흘려내렸다. 운명 전야에 얼마나 배를 곯았으면 이 딸을 찾아와 밥구걸할가.

어머니는 100세 생일을 쇠고 돌아가셨다. 초상 때 린근동네사람들까지 다 찾아와 호상이라고 푸짐히 차린 제사상음식도 깨끗이 나눠 먹었고 사들인 과일, 사탕, 과자도 다 나눠 가졌다.

(제사라도 제대로 차렸더라면 어머니가 배고파 찾아올 일은 없었을텐데…)

지나온  뒤쫓아가 보노라니 어머니께 효도 못한 일들이 가슴을 후벼냈다.

작년5월의 어느날 아침, 나는 엄마를 모시고 있는 친정올캐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동북에 계시는 올캐의 형님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였다. 집 걱정을 말고 어서 떠나라고 대답한 나는 그 길로 엄마집으로 갔다. 엄마를 돌본다는 명색이였을뿐 아들네와 한집에서 사는 나는 자기집이 걱정되여 엄마 곁에 제대로 있지 못했다. 올캐가 떠날 때 정해놓은 하루 세끼 식단만 제대로 갖추어드렸을뿐 량쪽 집을 오가느라고 언제 한번 어머니를 따뜻하게 보살펴드리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함께 지낸 나날에 나는 완전이 기계사람이 되여버렸다. 어머니의 기분, 식욕, 취미 따위는 전혀 불문하고 식당의 아줌마처럼 오직 정해진 식단메뉴에 따라 밥을 지어 대접했을뿐이였다. 더우기 엄마와 마주 앉아 오손도손 재미난 이야기를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친정올캐는 보름만에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머니는 그 이튿날로 돌아가셨다. 마치 손꼽아 며느리를 가다린 것 같았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제사는 지내지 않기로 했다. 설날, 생일, 기제사 모두 다 차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의 마음은 항상 허전하고 쓸쓸했다. 엄마가 저 세상에서 많이 외로울 거 같은 걱정이 항상 따라다녔다. 그리고 남들이 모두 제사 음식을 자실 때 유독 엄마만 주린 배를 끌어안고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나를 지리리도 괴롭혔다.  

그런데 예감이 들어맞은 것이다. 시장기에 시달리다 못한 엄마가 아버지의 점박이 말을 빌려 타고 곧장 딸의 꿈 속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틑날 나는 무작정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떠나간 바다가로 찾아나갔다. 아무래도 엄마를 저렇게 배 고프게 두어둘 수가 없었다.

나는 바다가에 꿇어앉아 조용이 눈을 감았다. 불현듯 머리 속에 커다란 물음표가 떠오른다. 생전에 자식에게 손 한번 내민 적 없었던 엄마가 저승에서 구걸 오시다니 그게 될법한 말인가 말이다. 분명 어머니는 배 고프다는 핑계를 대고 이 딸을 볼러 온 것이 아닐가. 요즘 심장병으로 앓고 있는 딸이 근심되고 안스러워 엄마가 다독여줄러 온 것이 틀림없다.

검푸른 갈기를 흩날리며 달려오는 파도는 마치도 엄마가 간밤에 타고온 점박이 같았다.

(엄마가 찾아온 모양이야)

나는 신을 신은 채로 바다에 뛰여들었다. 갑자기 큰 덩치파도가 나한테로 덮쳐들었다. 삽시간에 나는 물벼락을 맞았다.

“엄마”

나는 저도모르게 목청껏 불렀다.

어느새 파도는 저멀리로 유유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썰물에 잠긴 발목이 따뜻해나 나는 만져보기도 하고 문질러보기도 했다. 엄마의 손길이 닿인 듯 나는 부랴부랴 가방에서 어머니기 생전에 쓰시던 반찬그룻인 목각함지를 꺼냈다. 그리고 거기에 어머니거 즐겨 드셨던 고기류, 과일류를 가득 담아 고요한 썰물우에 띄웠다. 함지는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출렁이는 바다쪽으로 둥둥 떠갔다.  나는 두손을 합장하고 속으로 빌고 빌었다.

“어머니, 많이 드세요. 그리고 용서해주세요. 해마다 이맘 때면 이 딸이 엄마 잊지 않고 꼭 찾아올게요”

출렁이는 바다도, 거친 파도가 일던 바다도 순간 그렇듯 고요해졌다.

느닷없이 조용한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솟구쳐오르더니 이쪽으로 급촉하게 떠오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며 살펴보니 아까 내가 바다에 띄웠던 그 목각함지가 틀림없었다. 함지는 신들린 듯 하늘하늘 춤추며 달려오고 있었다. 함지는 어느덧 조류에 밀려 내 발치에 와서 맴돌았다. 탕빈 함지다.

(어머니께서 다 드신 모양이지)

밀려온 밀물이 다시 발목을 간지럽힌다.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이 닿인 듯 철썩철썩거리는 파도소리는 애잔한 어머니 화답인 듯 싶었다.

“순금아, 내 잘 먹었다. 맘 놓구 가거라”

엄마의 자상한 목소리가 방불히 들린다. 자식들을 안심시키려고 빈 그릇을 돌려보내는 어머니의 따스한 마음이 어느 때보다 사무치게 그리웁다.

2014년9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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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금 프로필

1949 8 22일 흑룡강성 밀산현 출생.

1972년 흑룡강성 호란사범학교 중문반 졸업. 1986년 연변대학 통신학부 조선어본과 졸업.

2005 6월까지 흑룡강성 상지시교원연수학교 민족교연실 조선어연구원 담당.

1985년부터 "흑룡강신문", "연변문학", "송화강" 등에 시, 수필 100여 편 발표.

흑룡강성조선족작가창작위원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