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민들레컵문학상> 가작상 수상작(2021.1.9청도)


바가지

한춘옥



푸른 잔디밭에 조각 같은 예쁜 별장이 앙증맞게 보석처럼 박힌 스위스에서 나는 제비들이 처마 밑에 자유롭게 날아드는 것을 보았다. 거울 같은 호수에 비끼는 하늘 이 주는 계시대로 자연을 사랑 한다는 그들의 삶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자연과 가족처럼 더불어 사는 스위스는 나의 동년시절을 그림처럼 펼쳐 주었다.

제비가 처마밑에 날아와 집을 짓는 이면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박씨를 땅에 심었다. 내가 심으면 박이 무럭무럭 잘 큰다고 하셨다. 나는 마치 흥부가 된것처럼 항아리 같은 박에서 보물이 쏟아지길 기다렸다.  

박씨는 흙을 뚫고 파란 잎을 하나둘 펼치더니 줄기를 뻗으며 바람벽을 타고 꼭대기에 올라 갔다. 지붕 꼭대기에서  하얀 박꽃을 피우며 멋진 풍경을 펼치더니 이어서 앙증맞은 박이 열렸다. 밤 자고 나면 눈덩이 굴리듯이 빨리도 커지더니 파란색이 노란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달밤에 쳐다보면 마치 올망졸망한 꼬맹이들이 조롱조롱 모여 앉아 있는 같다.

가을이 되면 나는 어서 빨리 박을 켜길 손꼽아 기다린다. 마치 박에서 보물이라도 쏟아질 듯이 아버지 주위를 맴돈다. 아버지는 박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따서 톱으로 켜고 다듬어 나에게 주면서 보물바가지라고 이름 지어주었다.

옛날에 바가지는 가정에서 그릇 이상의 보물로 쓰이는 귀중한 존재였다. 엄마와 만나는 바가지는 주방에서 물과 숭늉 그리고 국을 퍼담거나 가축의 먹이를 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컵의 선조인 바가지로 냉수나 숭늉 그리고 감주를 마시면 그렇게 시원하고 맛이 좋을 수가 없다.

바가지에는 은은한 향이 있다. 아버지 냄새 같은 깊은 울림이 있는 바가지에는 많은 그리움과 가족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노래방이 없는 옛날에 동네에서 모임이 있을 때면 바가지는 천연 악기로 등장을 한다. 나무 함지에 물을 담고 바가지를 엎어 놓으면 요즘 피아노 못지 않게 당당하다. 아버지는 저가락으로 절주 있게 두드리면서 흥을 돋구며 민요를 뽑아낸다. 엄마는 뒤질세라 엉뎅이 춤을 추면서 오락판을 펼친다. 세대주들의 고된 인생살이에 바가지는 그야말로 한몫을 톡톡히 한 셈이다.

아이들은 바가지 돌리기 유희를 놀면서 자랐다. 아버지는 처마 밑 제비둥지를 등장시켜 책에서 보지도 못한 <흥부와 놀부> 옛말을 창작해서 구수하게 들려주었다. 그야말로 보물 같은 바가지는 어린시절의 추억을 많이도 만들어냈다.

아버지는 땅의 기를 받은 박으로 바가지를 만들어서 필요한 자리에 쓰임을 받을 있게 보내준다. 제일 큰 바가지는 소여물을 주는데, 좀 투박한 것은 돼지 죽을 주는데 보내준다. 쪽바가지도 쓰임을 받을수 있게 이름지어 샘물터에 보내 주었다. 예쁘고 잘 다듬어진 바가지는 엄마의 주방용으로 작고 깜직한 것은 간장이나 쌀독에 또는 나의 놀이감으로 찾아온다. 이렇게 아버지는 바가지를 맞춤형으로 주인에게 보내준다.

한알의 박씨를 땅에 심어 바가지로 만들어서 곱게 보내주듯이 딸을 시집 보낼 때도 “지붕 위에 박이 바가지로 가는 날” 이라고 하면서 재치있는 유머로 분위기를 만 들었다. 궤짝에 보배처럼 보관해 두었던 가장 예쁘고 단단한 바가지는 결혼식장에 등장한다. 빨간 대추알을 담은 노란 바가지는 자손이 번성하기를 축복하는 화신으로 등장을 한다. 이런 축복의 끈으로 맺어진 부부는 하나의 박이고 한쌍의 바가지가 된다.

박은 흙으로  때까지 그릇을 초월한 한알의 박씨 사랑의 수행까지 짊어진 것이. 박씨는 자신의 썩음으로 새싹을 틔우고 하나하나의 잎을 펼치며 줄기를 뻗어 지붕에 올라가면서 얼마나 많은 비바람과 불볕의 시련을 겪는지 모른다. 삶의 지혜를 가르쳐 주는 바가지는 목마른 나그네에게 샘물 마시게 건네주는 풋풋한 인심을 베푸는 화신 이기도 하다. 삶의 갈증을 달래게 했던 쪽박이 대박으로 되기까지 수많은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것이.

아버지 장례식 날에  앞에서 바가지를 깨던 슬픈 기억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 거린다. 인생을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하면 슬프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완성이다. 사계절의 순환처럼 생명은 우주의 순환이다. 이 세상 모든 물질은 불멸이다. 나무가 불에 타면 없어지는것이 아니라 이산화탄소와 물이라는 다른 물질로 변할 뿐이다. 흙은 생명 그 자체이니 화학변화를 거친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질 것이다. 한알의 박씨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생명의 연속으로 이어질수도 있는 것이다.

요즘은 바가지 대용으로 컵을 사용하는데 색상이나 모양은 천차만별이다. 바가지는 점차 우리 시선에서 멀어지고 잊혀지고 있다. 나는 주방에 갖가지 컵을 사서 진렬해 놓고 물과 주스, 누룽지물과 커피, 액기스와 우유, 그리고 소주와 맥주, 와인까지 내용물에 따라 다른 컵을 사용한다. 하지만 아직도 크고 작은 바가지를 자유롭게 쓰면서 추억을 떠올린다.

요즘은 음식을 먹는것 보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즐기는 쪽으로 초점을 맞춘다.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있다고 컵이 주는 시각과 촉감 후각은 마시는 사람의 정서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바가지로 랭수와 감주를 마시면 가슴이 시원하게 팍 뚫린다. 가족의 자기마당 같은 바가지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있고 향기가 있다.

나는 한알의 박씨 같은 앙증맞은 컵을 두손으로 받쳐들고 바라본다. 아버지의 바가지 사랑이 떠 오른다. 그 어떤 꾸밈도 없이 투박한 바가지처럼 언제나 침묵으로 다가오던 그 사랑이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한알의 박씨가 주렁주렁 박의 가족을 만들며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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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춘옥 프로필

필명 한설

2009년 수필로 문단 데뷔

기원컵 압록강 문학상 금상, 송화강 수기3등상, 연변방송국 생활수기 대상 수차 수상.

청도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