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사업은 헌신 정신이 있어야 한다     


 
"노인협회는 인원도 방대하고 여론 형성에도 큰 몫을 하는 단체이지만 그 자체는 조혈 기능이 거의 없기에 헌신 정신이 아니라면 앞장에 나서기 어렵습니다."
1500여 명이라는 청도에서 가장 많은 회원을 거느리는 청도조선족노인협회의 김원 상무 부회장은 자신의 감수를 이렇게 밝혔다. 현임 김재룡 회장과 선후 7년간 파트너로 손잡고 일해오면서 어려움을 무난히 이겨왔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1944년 1월 한국 대구에서 태어난 김원씨는 그해로 부모의 등에 업혀 중국으로 이주해왔다. 목수 겸 운전기사이기도 했던 아버지 덕분에 살림은 윤택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고 공부도 할 수 있었다. 1965년 길림성 장춘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상시의 고향 마을에 돌아가 20년간 의사로 일하였다. 그간 내과 주치의사 직함까지 취득한 김원씨는 코리안드림에 따라 1991년도에 한국으로 떠났으며 1997년 중국으로 돌아온 즉시로 청도로 진출했다.
"큰 아들이 하얼빈중의학원을 졸업하고 청도제8인민병원에 실습오면서 무슨 일거리를 만들 수 없을까 하여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러나 정작 청도에 와보니 생각 같지 않았다. 가게방을 구입하고 병원을 차리려니 허가가 나지 않았다. 약방도 안된다고 했다. 큰 아들이 본업을 버리고 오토바이도소매업을 벌리면서 김원씨도 옆에서 거들어주게 되었다. 아들의 사업이 본궤도에 들어서자 김원씨는 이촌에 2층으로 된 가게방을 새로 마련해주고 뒷바라지에서도 손을 떼고 2002년부터 노인사업에 전력했다.
이창구 공원분회에서 회계로 출발하여 이창구지회 부회장을 거쳐, 총회 상무 부회장에 사무국장까지 겸하면서 노인 사업을 위해 매일 분주히 뛰어다녔다. 경비의 부족으로 가끔 사재를 털어야 할 때가 있었지만 청도조선족사회에 밑거름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그저 뿌듯하기만 했다. 노인사업은 시간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라고 한다. 우선은 열정이 있어야 하고 경제력도 다소 갖추어야 한다. 무보수적인 일인데다 일을 하고도 욕먹거나 단체의 일이면서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김원씨는 큰 아들마저 의학분야를 떠난 것이 가장 큰 유감이라면서도 어쩌면 그랬기 때문에 여유가 더 생겨서 자신이 노인사업에 몸담을 수 있었지 않냐고 진담 절반 농담 절반으로 말했다.
산하에 북부, 서부, 청양, 이창, 남부 등 5개 지회에 27개 분회가 있고 아리랑예술단과 악대 등 2개의 독립적인 기구가 있으며 비정기 내부 간행물 "꽃노을" 잡지도 운영하고 있는 조선족노인협회는 그만큼 청도조선족사회에서 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민족대형행사때면 노인협회는 천여 명까지 동원하는 파워를 보여주었고 근 20개의 게이트볼팀이 해마다 3,4차례 대항 경기를 펼치기도 한다. 김재룡 회장의 공로가 가장 크다고 여러번 언급한 김원씨는 조선족기업협회가 여직껏 경제적으로 가장 큰 버틸목이 되어주었으며 여성협회, 언론사 등 동포단체들에서도 든든한 뒷심이 되어주었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장학규 특약기자
날짜 : 2009년 08월 0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