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림신문> 아름다운 추억 응모 동상 수상작(2019년 2월)

 

똬리와 할머니

박영희


 

똬리란 무엇인지 지금 젊은이들은 모를 것이다. 똬리를 우리마을에서는  함경도 사투리로 따발이라고 했다. 일명 “또아리”라고도 한다.

옛날 녀성들이 물건을 머리에 일때, 물건의 중심을 잡고 머리에 직접 닿지 않게 하기 위해 머리우에 올려놓는 기구로 짚을 말아서 만들기도 하고 헝겁을 감아 말아서 만들기도 한다.

지난날 조선민족녀성들에게 없어서는 안될 로동도구였다. 60~ 70년대까지만 해도 널리 사용되였으나 시대의 변혁과 더불어  인젠 민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으로 되여버렸다. 그러나 조선족녀성들의 지혜롭고 강인하며 헌신적인 희생정신과 함께 마멸할 수 없는 력사적 흔적을 남겼다.

지금 젊은 세대들도 가끔 책이나 스크린을 통해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이 머리에 힘에 부치는 무거운 짐을 얹고 종종걸음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지금도 무대에서 물동이 춤이 관중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이렇게 크고작은 짐을 머리에 얹고 이동할 때 꼭 리용하게 되는 편리한 기구가  바로 똬리이다.   

똬리라면 나는 할머니를 떠올리게 된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손수 똬리를  만드시는 것을 자주 보아왔다. 옥수수 껍대기를 말리운 것에 물을 뿌려 축축해지면 틀고 땋아 만들었는데 한번 손을 대면 4~5개씩 만들어 동네분들에게 나누어주군 했다. 때론 헝겁에 색갈을 내여 감기도 하고 때론 옥수수 껍대기에 물감을 적셔 중간중간에 감기도 하여 예쁜 똬리을 만드셨다.

한번은 놀라운 일이 있었다. 석탄도 배급제를 할 때의 일이였다. 겨울이면 집집마다 석탄을 때여 온돌 구들을 덮혔는데 온 시내에 시탄장(柴炭場:석탄을 파는 )이라야 하나뿐인데다 석탄공급이 긴장하고 운반도구가 부족해 석탄을 사는 날이면 할머니는 아침부터 가장 바쁜 날이였다. 평시 나는 시탄장의 리어카 끄는 전문인이  리어카로 골목길까지 실어온 석탄을 부엌으로 나르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그러나 시탄장에 좋은 석탄이 왔다하면 아침부터 줄을 서서 반나절 기다려야 하였다.

그날도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시탄장으 갔다. 긴 줄을 서서 기다리던 끝에 정심때가 되였어도 우리의 차례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와 내가 륜번으로 줄을 서서 기다린 끝에 겨우 오후에야 석탄을 타게 되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몇대 되지 않는 리어카가 더러 고장이 나서 리어카까지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아무리 기다려도 언제 차례가 될지 누구도 몰랐다.

성질이 급한 할머니는 단연히 머리로 이여 나르기로 하였다. 할머니는 큰 함지에 석탄을 담고 또 그우에 큰 소래로 석탄을 담아서 옆장정들의 도움을 받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반달음쳐갔다.  그 작은 체구로 어떻게 무게를 이겨냈는지 알바 없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똬리가 평형을 잡아준 것만은 분명했다. 그날 할머니는 그 많은 석탄을 그렇게 몇번이나 이여서 집으로 옮겨왔었다.

똬리와 관련되는 하나 더있다. 60년대에 룡정기차역 앞에 모주석 초상탑을 높게 쌓은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수요되는 모래를 우리소학생들이 동원되여 강바닥에서 파서 날라왔었다.  우리는 몇달동안 소래에 모래를 담아 머리에 이고 시내 한끝에서 다른 한끝인 역전앞까지 오갔다. 만약 똬리가 없이 민머리에 무거운 모래가 든 소래를 인다면 정수리가 배겨서 불편한건 물론 평형을 잡을 수 없어 한손으로 소래를 부여잡아야 했지만 똬리만 있으면  두손을 놓고도 서로 이야기하며 한가롭게 길을 걸을수 있었다.

운반도구가 시원찮았던 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크고작은 짐을 녀성들은 대부분 머리에 이고 다녔다. 개혁개방 초기에도 우리 어머니세대들은 똬리를 머리에 올리고 짐을 운반하는데 더 습관이 되였던거 같다. 그것이 아마 그 시절의 가장 편한 방법이였을 것이다.

할머니는 평생을 똬리와 함께 하셨다.  몇십년을 무거운 짐을 머리에 얹고  다니셨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후날 고령이 되여서도 목이나 허리 또는 척추가  불편하다는 말씀을 들어보지 못햇다. 물론 무릅과 손 뼈마디가 시쿨고, 통세난다고 하면서 항상 지통약을 잡수셨지만 말이다.

만약 지난 세월 우리할머니들이 똬리란 생활의 지혜의 산물인 짐의 받침받이가  없었던들 고난의 년대에 어떻게 무거운 짐을 맨머리에 이고 넘고 건너 험난한 세월을 톱아 한걸음한걸음 앞으로 나아갈수 있었을가 생각해본다.

택시와 자가용이 보편화되면서 이젠 똬리가 자취를 감추었지만 똬리에 얹혀졌던 삶의 무게와 지겨움은 결코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똬리에 얼기설기 맺혀진 희노애락은 선인들을 그리는 추억의 매듭임에 분명하다.

 

* 2019년 2월 길림신문 “아름다운추억”응모 동상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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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프로필

1957 12 출생.

1982 7 연변대학 화학학부 졸업. 2017 12 청도농업대학 정년퇴직.

청도조선족작가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