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인물 - 한락연 그는 누구인가 

 

혁명가 예술가 한락연 추억 좌담회 민족문화궁에서 개최

 

 

 

 

 

 중국의 조선족이 낳은 걸출한 혁명가이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우는 예술가 한락연 추억 좌담회가 베이징시 장안가에 위치한 민족문화궁에서 21일 뜻깊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는 중국조선민족사학회, 중국미술관, 베이징시민족촉진회, 중공연변주위 선전부가 주최하고 민족출판사에서 주관하였다. 

  중국사회과학원 아태연구소 당위위원인 박건일 연구원이 ‘한락연 생애와 연구정황’란 제목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저명한 미술사학가이며 이론가, 서화가인 류희림 선생이 ‘동방의 피카소- 한락연 예술성과’를 발표, 한락연의 딸 한건립이 ‘혁명부부-나의 어머니 류옥하’란 회상기를 발표하였다. 연변자치주 용정시 전임 시장이며 한락연 연구회 회장인 박호만 선생이 ‘홍색용정의 파종자-한락연고향에서 온 보고’를 했다. 

 

이번 좌담회에 중공중앙 서기처 서기, 원 중앙통전부 부장 염명복(闫明复), 전국정협 원 부주석 조남기가 축하메시지를 보내왔다. 원 국가민위 이덕수 주임, 원 중국인민해방군측량학원 허용규 정위, 원 중국인민해방군 낙양외국어 학원 류병훈 정치부 주임, 원 중화전국신문사업자협회 서기처 이현덕 서기, 국가민위 기관당위 김성화 상무부서기 , 원 민족출판사 우빈희 사장 등 성부급 력임 및 현임 지도자, 한락연연구 및 당사 연구 전문가, 민족출판사 조문편집부 박문봉 주임, 중앙인민방송국 조선어부 김광영 주임 등 베이징 국가기관 및 민족문화기업과 사업단위 대표 및 베이징조선족기업가협회, 애심포럼, 노인협회 민간단체 대표 등 150여 명이 참가해 한락연추모사업에 대한 높은 관심과 지지도를 읽을 수가 있었다.  

특히 조선족노일대 혁명가의 유가족들이 대거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조선족혁명가 김산의 아들 고영광(원 국가경무위기술과장비사 부사장), 저명한 원예학가 유자명의 딸 유덕로(베이징과학기술대학 교수),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 장군의 손녀 등이진, 혁명작곡가 정률성의 딸 정소제, 조선공산당재건위원회 위원이며 조기혁명가인 김찬의 아들 김연상, 연변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의 아들 오건, 원 국가민위 부주임 문정일의 아들 이길양, 조선의용군 전사이며 제3, 4기전국정협위원 최재의 아들 최위민, 조선혁명가 김규광의 아들 두건(원 중앙미술학원 원장), 노항일연군전사 이재덕 여사의 아들 우광 등이 참석하였다. 

 

중국혁명에 기라성같이 등장하여 커다란 족적을 남긴 조선족노일대 혁명가들의 유가족들을 보면서 오성붉은기에 스며있는 우리 조선민족의 피어린 희생에 대해 다시한번 새삼 느끼는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 56개 소수민족중의 당당한 일원이라는데 대해 무한한 긍지감과 자호감을 느끼게 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좌담회는 민족출판사에 금년초에 새로 부임되어 온 박영일 사장이 유창한 중국어로 사회를 보았다. 

 

한락연은 1898년 12월 8일 지금의 용정시 지신진 공농촌의 한 조선족가정에서 출생하였다. 한락연은 청소년시기에 벌써 계몽교육과 제국주의와 일제를 반대하는 애국주의 교육을 받았다. 1919년 3.13 반일시위운동에 적극 참가하여 밤도와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어 시위때 사용하게 하엿다.  

 3.13 반일시위가 진압된 후 그는 일본군경의 체포를 피하여 소련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조선 조기공산주의자 이동휘를 만났고 이동휘와 함께 상하이에서 고려공산당 건립과 독립구국활동에 참가하였다. 한락연은 이동휘를 도와 ‘공산당선언’, ‘적기’, ‘신청년’ 등 진보서적들을 번역출판하였다. 

 

그는 중국공산당 조기 지도자의 한 사람인 채화삼(蔡和森)을 알게 되어 그의 소개로 1923년 여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한락연은 중국조선족으로는 제일 처음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혁명가이다. 

 

1925년 2월 한락연은 중앙의 지시에 따라 소련에 가서 학습하였다. 귀국후 그는 임필시(任弼时)가 파견한 오려석과 이대소(李大钊)가 파견한 임국정 등과 함께 선양에서 첫번째로 되는 중국공산당지부를 건립하였다. 1925년 7월 그는 오려석 등과 함께 하얼빈에 중공북방지방위원회를 건립하였으며 초도남, 소자원, 조상지(赵尚志) 등과 한지부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 한락연과 오려석은 진위인을 협조하여 중공 만주성위의 전신인 중공만주임시성위를 설립하였다.  1928년부터 한락연은 하얼빈, 치치할 등 곳에서 당의 비밀연락지점과 정보망을 세웠다. 

 

1929년 가을 한락연은 중공중앙의 동의를 거쳐 프랑스로 유학, 프랑스루브르대학에 입학하여 서양화를 전공하였다.  유학시기 한락연은 프랑스공산당이 영도하는 반파쑈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1936년 한락연은 유럽화교연합회에 참가하였고 1937년 10월 당조직의 결정으로 한락연은 기타 10명 유학생과 함께 서안사변의 조직자인 양호성(杨虎城)장군을 호송하여 귀국하였다. 

 

1938년 한락연은 곽말약(郭沫若)이 조직하는 작가, 예술가들의 연안 방문단 성원으로 연안을 방문하였고 모택동주석의 친절한 접견도 받았다. 한락연은 연안여자대학에서 강연도 하였다. 

 

1939년 4월 한락연은 국민당전지(战地)당정위원회 소장(少将)지도원으로 임명되어 국공 두 부대사이를 오가며 통전사업에 종사하였고 그해 10월에 중경에서 항일구국에 몸담고 있던 류옥하(한족)와 결혼하였다. 

 

1940년 보계에서 국민당특무에 의하여 비밀리에 체포되였으나 당조직과 이제심(李济深) 등 인사들의 적극적인 노력하에 1943년에 가석방되였다. 

 출옥후 한락연은 당조직의 지시에 따라 서북에서 그림사생을 하는 한편 국민당 서북 상층 요인들에 대한 통전(统战)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는 상하이미술전문학교와 프랑스에서 닦고 연마한 미술조예로써 변강소수민족의 풍토인정을 표현하였을뿐만아니라 일종 참신한 회화주제를 개척하였다. 

 

그는 제일 처음으로 키질벽화(克孜尔石窟壁画)를 연구한 첫번째 중국화가로서 일생동안 무려 20여차례의 개인전을 가졌다. 

탁월한 미술재능은 그가 국민당서북지구 상층인문들 혹은 소수민족 두령들과 접촉하고 사업하며 또한 적극적으로 서북지구 해방을 위한 준비사업을 전개하는데 편리를 제공하였다. 

 그는 한 동굴석벽에 사람마다 키질벽화를 보호하자는 내용의 친필 글발을 남기였다. 

 

1947년 7월 30일 한락연은 적화에서 란주로 가는 도중 비행기사고로 불행히 49세 나이로 사망하였다. 

 

1950년 10월 베이징에서 거행된 공화국창건 1주년 경축 그림전에는 33폭의 한락연 작품이 전시되었다.  1953년 류옥하는 한락연의 유작 135점을 무상으로 국가에 헌납하였다.  1956년 중앙인민정부에서는 혁명렬사증서를 발급하였다. 

 

1962년 주은래총리는 염보항(闫宝航)선생에게 “방법을 다하여 한락연의 역사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그의 전기를 써야 한다,”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정부에서도 한락연에게 대통령 표창장을 수여하였다. 

 1988년 한락연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국가민위와 연변주가 연합으로 민족문화궁에서 “한락연유작전”을 개최하였다. 

 

1998년 한락연 탄생 100주년 그림전이 중국혁명박물관에서 개최되었고 고 최룡수 주필로 된 “한락연을 그리며”책자가 출판되었다. 

 

한락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2010년 11월 용정시위와 시정부는 “한락연연구회”를 발족하였다. 2011년 5월 연구회는 락연공원내에 한락연 동상을 세었다. 그해 7월 용정에서 한락연연구세미나가 개최되었으며 조남기 부주석이 개막식에 참석하고 이덕구 민위주임이 연설하였다. 

 

좌담회 참가자들은 한락연의 찬란한 일생을 네명의 발언자들로부터 주의깊게 들으면서 중국조선족이 낳은 저명한 혁명가이며 중국의 ‘피카소’라고 불리우는 예술가 한락연의 고상한 정신을 기리였다. 

 매 참가자들에게는 민족출판사에서 재판한 ‘한락연을 그리며’책자가 한권씩 선물로 차례졌다. 조남기 부주석이 제사를 쓰고 책명을 쓴 이 책은 한락연 혁명가의 일생에 대해 깊이있게 요해하고 널리 홍보하는데 둘도 없는 소중한 사료이다.    

 일찍 이덕수 원 민위주임은 한락연에 대해 첫째 가장 일찍 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족(1923년), 둘째 선양에 당조직을 건립한 제1인, 셋째 국제반파쑈전쟁에 참석한 조선족, 넷째 1939년에 국민당 소장칭호를 받은 조선족, 다섯번째로 동부지역에 당조직을 창건한 선구자로 개괄하였다. 

 한락연좌담회는 우리 조선민족 혁명선렬들에 대한 사적들과 정신이 날로 잊혀져가고 있는 오늘 사회에 한줄금 퍼부은 단비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 민족은 미래가 없는 민족과 같다. 우리는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바로 한락연과 같이 허다한 조선민족의 혁명선열들의 희생이 없이는 중화민족속의 조선민족이 당당한 지위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락연좌담회가 베이징에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조선민족이 집거해 사는 지역마다 한번씩 돌면서 순회강연이 진행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박영만 기자 

 

 

사진설명: 한락연좌담회 현장사진, 민족출판사 박영일 사장이 사회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