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를 이겨가는 조선족사장들의 이야기 36
영웅은 출처를 묻지 않는다
일본 아지반화장품 중국총판 이광춘 사장
16세 어린 나이에 동북의 농촌에서 광둥성 선전에 진출하여 31년 간 분투하며 성공일로를 달려온 조선족 기업가가 있어 화제이다. 그 주인공은 현재 일본 아지반화장품회사 중국총판을 맡고 있는 이광춘 사장(48세)이다.
어린 나이에 선전에 진출
이광춘씨의 고향은 흑룡강성 계동현이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일본어를 배워온 그는 일본어 구사에 남다른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계서대학 1학년 반학기를 다니던 그는 나이 든 동창들과 함께 무작정 남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버지와 형님이 가난으로 인해 돈 벌기 위해 계동탄광에 일하러 가고 누나가 식당일을 하면서 자신의 학비를 대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웠다. 결국 가난이 그를 일찍 사회에 발을 디디게 한 것이다.
계서에서 하얼빈, 베이징, 광저우를 거쳐 선전까지 6박6일 기차에서 부대끼면서 처음으로 세상이 녹록치 않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계서대학 일본어학과는 일본어 인재를 대량 배출한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어학과를 졸업한 대부분 조선족들은 당시 일본기업이 가장 많이 진출한 개혁개방 1번지 선전으로 찾아갔다.
이광춘도 그 중의 일원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는 아직 성년이 아닌 16세 어린 나이라는 점이다.
첫 면접에 성공하여 입사한 곳은 시계줄을 만드는 일본공장이었다. 후다바(二叶)라는 일본총경리의 통역으로 들어갔는데 첫달 봉급이 2000홍콩달러였다. 인민폐로 환산하면 1500위안, 당시 동북 공무원의 노임 200여원 수준에 비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수자였다.
일본인 관리인이 7명, 홍콩관리인이 8명 있는 회사에서 그는 점차 성숙되어 가고 있었다.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던 광동어(粤语)에도 점차 귀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날 후다바 사장이 그를 데리고 제2공장으로 일보러 가다가 문제가 생겼다. 백망(白芒)해관을 지나야 하는데 통행증이 비에 젖어 알아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아니면 신분증을 내놓으라 한다. 그러나 16살 밖에 안되는 총각에게 무슨 신분증이 있으랴. 결국 회사에서 보증을 서서 출장을 다녀왔지만 신분증문제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혀왔다.
결국 한곳에서 오래 일을 못하고 크라운전자, 일본건축회사, 일본제약공장 등 여러 일본기업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에서 6년 칭다오에서 10년
1995년 4월 23일 이광춘씨는 선양에서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선전에서 만난 이무라(井村) 사장과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그의 담보로 일본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무라 사장은 이광춘씨가 어린 나이에 일본어를 막힘없이 구사하고 모든 일에 호기심과 의욕에 불타는 눈빛을 보고는 신동이라고 칭찬하였는데 결국 두사람은 막연지기로 된 것이다.
일본에서 그는 이무라 사장의 손밑에서 플라스틱 사출, 금형 기술을 배웠다. 당시 이무라 사장은 녹화기로 방영하는 테이프(录像带)대여점을 일본 전국에 6000여곳 운영하고 있었는데 앞으로 중국공장을 세울 계획으로 이광춘 사장을 선정한 것이였다.
일본인들의 겸손, 양보, 근신 등 처세술과 일에 몰입하여 정성을 다하는 장인정신은 이광춘씨에게 깊은 인상과 영향을 주었다.
1997년 이광춘 사장은 드디어 칭다오시 황다오 개발구에 위치한 탁월플라스틱사출회사 총경리로 부임된다. 이광춘 사장의 손을 거쳐 생산되는 녹화테이프는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어 일본의 가정집에 흘러들었다.
칭다오에서 그는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창립멤버(회원)로 가입했으며 자오저우, 황다오, 자오난 지역의 첫 지회장을 맡기도 했다. 한편 일본과의 거래 우세를 이용하여 칭다오 조선족기업인들에게 적잖은 기회를 제공해주기도 하였다.
2003년 3월 23일 그는 칭다오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해천호텔에서 녕안 출신의 아름다운 조선족신부와 백년가약을 맺었으며 2007년에 귀여운 딸애를 보았다.
그의 인생은 칭다오에서 마무리하는 듯 싶었다.
선전에서 재 도전
이광춘 사장이 믿고 따르던 이무라 사장이 갑자기 심장병으로 돌아갔다. 전혀 예고가 없던 일이라 이광춘 사장은 다시 한번 인생의 선택 기로에 놓여졌다.
당시 녹화테이프사업은 하루가 멀다하게 변화되는 CD, VCD, DVD 로 인하여 이미 저조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다시 한번 도전해보자!”
자신의 별명을 싱가포르 지도자 이콴요(李光耀)의 이름을 따서 부르는 이광춘씨는 2006년 8월 칭다오에 있던 집을 팔고 그 밑천으로 선전에 도전장을 다시 내밀었다.
선전에서 그는 일본 지인들의 소개로 캐릭터 오더 관리업무에 손대기 시작하였다. 열쇠고리, 가방고리 등에 장식용으로 많이 쓰는 작은 인형들인데 최근에는 애니메니션(动漫)에서 나오는 주인공들을 모방한 캐릭터 제품들로 점차 변화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캐릭터들이 그의 손을 거쳐 월 300만개, 연 평균 3000만개 가량이 선전공장에서 만들어져 일본 등 세계 각지로 수출되고 있다.
2012년도에 그는 연속 3개월 간 월 평균 수출 380만 개, 수출액 3800만 위안의 기록을 세우기도 하였다.
2007년 8월 도쿄에서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우연히 옆에 앉은 일본사람과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친절한 대화를 거쳐 홍콩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이미 친구로 되어 있었다. 알고보니 그 사장이 바로 일본아지반화장품회사의 미쯔이 본부장이었다.
그 때부터 이광춘 사장은 캐릭터사업 이외 아지반회사의 화장품 포장용기 중국공장 생산공급을 담당하고 있다. 쥬브라(胶管) 등 친환경 일본생활화장품 용기를 이광춘 사장이 중국공장들에 오더를 주어 공급하는 것이다. 남다른 신용과 뛰어난 사업능력으로 이광춘 사장은 2012년에 일본 아지반화장품회사 주주로 발탁되었다. 아지반회사의 나까무라 사장, 다나까 전무, 미쯔이 상무가 당해 12월에 직접 홍콩으로 날아와 위임해 준 것이다. 아지반화장품회사는 2013년 10월에 도쿄증권 이찌부 거래소에 정식 상장하였다. 2018년 8월 이광춘 사장은 중국 총판 전권도 위임받았다.
이광춘 사장은 현재 선전에 엽금산(叶今山)국제무역회사와 홍콩에 설금산(雪今山)국제무역회사를 두고 있다.
16세 나이 때부터 지금까지 매일 새벽 4시 좌우에 일어나 여러가지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광춘 사장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빨리 일어난 새가 먹이를 먹을 수가 있습니다.”
/ 박영만 기자
사진: 이광춘 사장이 장쑤성 옌청 대풍구에 위치한 한국콜마보건품생산업체를 찾아 합작사항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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