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다오조선족장식협회 회원 계렬보도 9

 

인생 3박자는 사업과 생활, 가정의 화합이죠

한국LG 바닥재 산둥대리 김성흠 사장의 창업스토리

 

 

 

 한국LG바닥재 산둥대리 김성흠 사장은 첫눈에 열정적이라는 강한 느낌을 받는다. 82년생 멍멍이띠 출생이라서 성실하고 충실할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낙관적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사업과 생활, 가정이라는 인생의 3박자를 조화롭게 운영해온 굵직한 땀방울로 맺어진 10년동안의 창업스토리에 빠져든다.

 

 사업편: 일반직원으로부터 동업자, 사장까지

 고향이 지린성 반석현인 김성흠씨는 어려서부터 한족학교를 다녔는데 우수한 성적으로 창춘대학 본과전업을 졸업했다. 

중학교 시절 선양에서 사업을 벌이던 아버지가 실패하여 가정형편이 어렵게 되자 일찍 셈이 든 그는 대학교에서 한국유학생을 고용하여 한국어학습반을 꾸리는 등 아르바이트로 대학 4년 비용을 자체로 몽땅 해결했다. 

 웨이하이에 있는 누나의 소개로 2008년 그는 처음으로 고향을 떠나 산둥땅을 밝았다. 첫 입사한 회사가 한국의 LG장판을 판매하는 옌타이대원(大源)무역회사 웨이하이 판사처였다.  

 집에서 바닥은 사람이 가장 많이 접촉하는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촉감은 물론 보행성, 위생이나 오염 면에서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게 없다. 

60년 역사를 갖고 있는 LG바닥재는 한국기업들의 진출과 함께 중국대륙에 전파되기 시작했다.  LG바닥재는 친환경, 포름 알데히드 제로(零甲醛)에, 전기장판 성능이 뛰어나고 쉽게 변형되지 않으며 세균이 잘 끼지 않고 탄성이 있는 등 다섯가지 특점(5福特点)으로 소비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웨이하이시는 중국과 한국 간에 제일 처음 교류를 시작한 항구도시이다. 평범한 영업일군으로 입사한 김성흠씨의 발자국은 웨이하이 한국기업을 따라 방방곡곡에 찍혀졌다. 한달에 신 한컬레 꼴로 부지런히 영업을 뛴 결과 이듬해에 3명 주주중 한사람으로 되었다. 

  2012년 회사는 사업확장으로 본사를 칭다오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때 김성흠씨는 이미 이 회사의 사장으로 되어 있었다. 그는 회사의 상호를 칭다오부원(补源)상무유한회사로 등록하고 법인대표로 취임하였다. 입사부터 회사 사장으로 되기까지 불과 4년 만에 이룬 것이다. 

회사는 현재 청양구 홍싱메이카이룽(红星美凯龙) 4층, 청양구 흥양로 스지메이쥐장식성(世纪美居装饰城) 2층과 청양과 지모 사이의 월성가구(月星家居) 남문 1층에 매장을 두고 활발한 영업을 벌리고 있다. 이외 웨이하이와 즈보(淄博)에 대리점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창춘, 지린, 선양, 하얼빈 등지에 50여 개 위탁판매대리상을 거느리고 있다. 

LG장판은 가정집은 물론 상업용으로 칭다오70스포츠센터, 지모시인민병원, 중국석유대학, 웨이하이 삼성전자스캔기 생산공장, 옌타이개발구 현대자동차 연구개발센타(1만 제곱미터),  둥잉(东营)시 특별교육학원 유치원 등 허다한 업소들에도 설치되어 있다. 

영업액도 연간 5~600만 위안으로 많을 때는 1200만 위안까지 도달한 적이 있다. 

  

가정편: 아내와  가정 사랑

김성흠씨의 아내와 가정 사랑은 남다르다. 현재 그는 아버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세살, 한살짜리 딸, 아들애와 한집에 살고 있다. 이외 장인과 처제도 지근거리에서 돌보아주고 있다. 

대학졸업 후 창춘 버스역에서 운명처럼 만난 한족아내는 예나 지금이나 그의 사업의 든든한 지지자이다. 

당시 연애시절 김성흠씨가 먼저 웨이하이로 오게 되자 여자부모쪽에서 1000위안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 돈에다 자기가 저축해둔 1000위안을 합쳐 도합 2000위안이 김성흠씨의  창업밑천이었다. 

웨이하이에서 자리가 잡히자 여자친구를 데려왔는데 창업초기인지라 두 사람은 산중턱에 위치한 가격이 싼 판자집을 임대하여 들었다. 그때 모기가 얼마나 많았던지 맨날 저녁 모기와의 전쟁이었다고 김성흠씨는 웃으며 말했다. 

웨이하이에서 업무를 뛰던 중 김성흠씨는 룽청(荣成)에 위치한 한국식품회사에서 고추를 대량 요구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지인의 소개로 그는 내몽골에 있는 고추생산 농가와  연계를 맺어주었다. 이 일을 성사시키느라 그는 웨이하이와 내몽골 사이를 20번도 넘게 다녀왔다. 

어느 한번은 고추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빗속에서 오다보니 포장이 허술하여 웨이하이에 도착한 물건속에 빗물이 들어갔다. 급해난 금성흠씨는 바로 두손을 걷어붙히고 고추를 바당에 말리기 시작했다. 때는 6월의 뙤약볕이라 맨손으로 고추를 나르자 그의 두손이 얼얼해나기 시작했다. 고추가 차속에서 궤어오르면서 원체 온도가 높은데다 해빛까지 쬐이자 삽시간에 고온으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20톤 되는 그 많은 고추를 몽땅 마당에 널고야 말았다. 대가도 톡톡했다. 그의 두손과 팔뚝, 눈가에 아직도 그때 덴 상처가 어슴프레 남아있다. 

그는 그때 고생스레 번 돈으로 아내에게 미용원을 차려주었다. 

아내가 딸를 임신한 2014년, 고향에 살고 있는 장인이 페암에 걸렸다. 김성흠씨는 두말없이 혼자서 고향으로 돌아가 장인의 병을 간호하였다. 1년 후 장인이 저 세상에 돌아갈 때까지 그는 단 두번 웨이하이에 왔다갔을뿐이다. 

 재작년 아들애의 탄생은 그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가져다주었다. 그는 자신의 몸속의 핏줄이 후대에 지속되어간다는 감격을 생생히 느꼈다. 또 이 대가족을 영위해가는 자신의 어깨에 놓여진 짐을 끝까지 지고 씩씩하게 걸어가리라 결심했다. 

 

생활편: 삶을 즐겨라

현재 김성흠 사장은 1982년 출생 멍멍이팀 팀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100명 남짓한 동갑또래 모임에서 선줄군 역할을 하고 있다.  

2년전 칭다오70스포츠센터 대형모임에서 발족한 82멍멍이모임은 일년에 서너번 행사를 치르면서 띠동갑들의 친목을 다지는데 일조하고 있다. 

김성흠 사장은 칭다오조선족장식협회 창립멤버중의 한사람이기도 하다. 초창기 장식업종에 종사하는 몇몇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발전되어 온 것이 지금의 칭다오조선족장식협회이다. 장식협회의 상임이사로 있는 김성흠 사장은 현재까지 세차례 조직한 조선족장식협회 판촉행사에 주력회사로 모두 참석하였다. 

이외 그는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청양지회 및 경주김씨 칭다오친목회에도 빠질 수 없는 주력일군이다.

애호도 다양하다. 축구, 배구, 배드, 등산, 헬스… 특히 노래를 즐긴다. 대학시절 그는 ‘一路上有你’노래를 무대에서 불러 일약 교내 10대 명가수가 된적도 있었다.  칭다오의 각종 행사에서도 그의 격정에 넘치는 노래소리를 들을 수 있다.  노래가운데서도 그는 ‘热情的沙漠’, ‘怒放的生命’ 이 두 노래를 즐겨 부른다. 

그는 젊은이는 격정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생은 동력이 필요하다. 특히 젊은이들은 격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인생에서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사업, 가정, 생활, 김성흠 사장은 오늘도 끓어넘치는 열정으로 인생의 삼박자 화음을 열심히 연주해가고 있다. 

/박영만 기자

 

사진설명: 한국LG바닥재 산동대리 김성흠 사장이 청양구 스지메이쥐 가게에서 아내 (오른쪽 )와 함께 제품을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