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농남’ 특색양고기 구이로 성공
따뜻한 도시남자 한영철의 성공이야기
칭다오에서 양고기꼬치구이의 한축을 이루고 있는 ‘따농남’, 가슴 따뜻한 도시농민남자라는 줄임말로 명명된 ‘따농남’ 의 대표 한영철(1983년생)씨를 만난 것은 봄바람이 포근한 월요일 오후였다.
고향이 화룡시 투도진 명동촌인 한영철씨는 1999년에 칭다오에 진출, 그러나 가방끈이 짧고 배운 재간이 전무한 그가 칭다오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회사 출퇴근을 반복하며 거의 일년간 친구 집에 얹혀 살면서 한방을 쏠 당찬 꿈을 꾸던 그의 인생은 어느 하루 있은 야간포장마차 양고기꼬치구이를 먹으면서 바뀌게 된다.
그의 입맛에는 별로였지만 함께 간 친구들이 맛있다고 호평일색인 것을 보고 놀란 것이다.
(그렇다. 화룡의 작은 꼬치를 가져다 해보자!)
한영철의 머리에 떠오른 건 맛과 향기가 일품인 고향 화룡에서 유행되던 작은 양고기 꼬치구이었다. 하나에 1위안씩 하는 작은 양고기 꼬치구이가 2위안짜리가 유행인 칭다오시장에서 먹힐 것 같았다.
대학생 큰 아들에 비해 가방끈이 짧은 둘째 아들때문에 항상 걱정이던 부모님이 지원사격에 나섰고 여자친구마저 응원해 나섰다. 그는 화룡의 지인을 찾아 양념 배합법을 배워왔고 여자 친구 엽성과 함께 정식으로 꼬치구이에 나섰다.
2012년 봄 ‘따농남’, 즉 도시의 따뜻한 농촌남자라는 이름으로 명명된 간판이 칭다오시 청양구 야간포장마차거리에 오픈한다.
그 누구도 자그마한 포장마차에서 구이가마를 달랑 6개 놓고 시작한 꼬치구이가 칭다오꼬치구이시장에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고기와 비게가 적당히 조합을 이루고 많이 먹어도 질리지 않는 1위안짜리 양고기 꼬치구이는 시영업 첫날부터 ‘따농남’이라는 독특한 브랜드를 타고 선풍적인 인기를 타기 시작하였다. 날마다 문전성시를 이뤘고 매출액은 급상승하여 하루에 최고로 1만4천 위안까지 올라갔다. 대박이었다.
꼬치구이를 시작하여서부터 그와 여자 친구는 하루 3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다. 새벽3시까지 영업하고도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오토바이를 타고 시장에 가서 가장 신선한 식자재를 직접 구입하였다.
‘따농남’의 브랜드가 식을줄 모르자 여기저기서 작은 꼬치를 구워대기 시작하였고 ‘따농남’은 일순간 위기에 봉착한다. 매출액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단골들이 이집저집 기웃거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가족들은 요즘 옆집에서 잘 팔리는 것이 어떠 어떤 것이라면서 한번 해보자고 권장하였다.
그러나 한영철은 단연히 고개를 저었다. 남들을 따라 한다는 건 영원히 남들의 뒤꽁무니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남들이 잘하는것을 따라 하기보담도 내가 잘하는 것을 남들이 따라하게 하고 싶었습니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사이로 뽀송뽀송 육즙이 배어나오는 것을 지켜 보면서 한영철씨가 수줍게 내비쳤다. 가벼운 어조였지만 결연한 의지가 돋보였다.
모방은 언제나 모방일 뿐이다. ‘따농남’을 흉내내는 사람은 많았지만 제맛을 내는 사람은 없었다. 작은 꼬치의 맛을 인정한 사람들은 또다시 작은 꼬치의 원조인 ‘따농남’을 찾았고 ‘따농남’은 온건하게 상승가도를 달렸다.
불과 1년만에 ‘따농남’의 한영철은 옷견지 3개를 달랑 들고왔던 백수청년으로부터 살림집과 자가용과 이쁜 아내를 둔 멋진 청년으로 환골탈태하였고 옌타이, 웨이하이, 자오저우, 장쟈커우는 물론 한국에도 체인점을 둔 사업가로 변신하였다.
그러나 체인점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여러가지 문제들도 수면위로 떠올랐다. 어떤 체인점은 장사가 억수로 잘되었으나 일부 체인점의 장사는 날마다 못해갔고 심지어 문을 닫았다. 원인을 캐어본 결과 장사가 안되는 체인점에서는 주방장의 입맛에 따라 맛을 조절하였던 것이다.
“검증된 맛을 왜서 개변하려고 합니까? 맛에 대한 확고한 신심이 없던 사람들은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기에 결과적으로 실패를 초래했다고 생각합니다. “
체인점의 경영관리에 직접 깊숙히 개입할 수 없었기에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을 알게 된 한영철은 현재 체인점 대신 직접 투자하고 직접 경영관리하는 직영점 개발에 책략을 두고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음달 상하이에 오픈하게 되는 ‘따농남’도 합작형식으로 운영하는 직영점이라고 한다.
인젠 성공한 기업가로 여유있게 보낼법도 하건만 이른 새벽 일찍 일어나 물건을 구입하고 양념을 배합하는 것으로 여는 한영철의 하루 일과는 지금도 변함없다.
“확실하게 믿고 절대 맛보지 말라!”
한영철이 내린 철같은 규정이다.
그는 그 누구를 불문하고 정해준 표준대로 원자재와 양념을 저울에 달아서 넣으라고 강조한다. 인간의 혀바닥은 간사한 물건으로서 컨디션의 좋고 나쁨에 따라 입맛도 틀려지기에 그때그때의 입맛대로 하다보면 원래의 맛을 잃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요즘 한영철씨는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이쁜 마누라에 세살짜리 귀여운 딸 한의나까지 있어 너무 행복하지만 가족유람을 떠나자는 마누라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밤낮없이 꼬치만 구워 팔다보니 연애 한번 제대로 못하고 결혼했다. 마누라에게 항상 빚진 마음이어서 마누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지만 지금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던 우리는 이만큼 잘 살지만 양쪽 부모형제들은 아직도 넉넉하게 살지 못합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이 다 잘 살때 향수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잘 살아보겠다고 한국에 가려고 6만 위안 고리대를 꿨다가 몇해동안 뼈빠지게 고생했던 부모님들의 피눈물 겨운 사연을 터놓으면서 한영철은 “양가부모님의 만년을 행복하게 해드리는 것이 최대의 소원이다.”고 말했다.
고향행사가 있을 때마다 성금을 내어 후원하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항상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던 한영철씨는 올해 재칭다오화룡향우회 부회장으로 당선되고 더 폭넓은 봉사의 길에 나섰다.
자그마한 양고꼬치에 희망을 담아 인생 대역전을 실현한 도시속의 따뜻한 농촌남자 한영철, 꼬치구이의 외길을 달려가는 한영철의 내일에 진달래 미소를 보내주고 싶다.
허강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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